나의 개똥철학

오만과 겸손

금빛오오라 2014. 12. 24. 06:06

오만이란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잘난 체 하며 내세우는 것이다.

오만은 수준에 이르지 못한 자나 수준에 이르지 못할 자의 유치한 자기표현방식이다.

 

오만함의 크기는 거짓스러움의 정도와 같고, 편협함의 정도와 같고, 집착의 정도와도 같고, 탐욕함의 정도와도 같고, 이기심의 정도와도 같고, 착각의 정도와도 같고,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정도와도 같다. 자신을 볼 수 있는 자가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자이다. 자신을 보는 정도는 상대를 보는 정도와도 같고 세상을 보는 정도와도 같다.

 

세상 사람 거의 모두가 오만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못보니 자기가 오만한 줄을 모른다. 제 잘 난 맛에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하고 자아도취시켜 그 맛에 살아가는 것이다. 오만한 자일수록 진실을 알아볼 수 없으며 진실된 자를 오만하게 보게 되어 있다.

 

누구나 자신은 '오만하지 않다' 혹은 '오만하지 않을 수 있다' 하겠지만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자는 지극히 드물다.
바르고 깊은 뜻을 가진 수준에 이른 자는 오만치 않게 되어 있다. 그러한 자가 하는 모든 것이 진실되므로 오만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오만치 않음'이란 수준에 이르면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누가 '오만하지 마라' 해서 오만치 않게 되는 것이 아니며, '오만치 말아야지' 하며 노력한다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단, 스스로 깨우치기 불가능한 부족한 자들에겐 반복적인 반강제적 주입식 교육이 필요하다. 그러한 자들은 참선도 많이 해야 한다. 자신을 고쳐 성장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생활화한 자는 굳이 참선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것은 자신을 볼 수 있는 자만 가능하다.

 

수준이라는 것은 모든 면이 동시에 성장하고 오르게 되는 것이지 어느 하나만 삐죽 성장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니 '오만'이라 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자가 진실된 자이고, 편협하지 않는 자이고, 집착하지 않는 자이고, 어질고 착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마음을 가진 높은 자이다. 오만한 자는 절대 수준에 이를 수 없다.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거나, 자신을 몰라줘서 애닳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아직 오만함이 남아 있다는 것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홀로 남겨지는 것에 외로움을 느낀다면 그 자신이 인정받고 싶어함이 남아 있다는 것이니 이것 역시 오만함이 남아 있기에 그러한 것이다.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자는 홀로 남겨져도 외롭지 않게 되어 있다.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일수록 수준이 낮고 오만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 오만하지 않게 되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 자신을 내세우는 것도 거짓스러움이고, 자신을 낮추는 것도 역시 거짓스러움이다. 이 둘의 거짓스러움의 근원은 같은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진짜 겸손은 자신을 애써 내세우려 하지 않고 애써 낮추려 하지 않는다. 이것 역시 그러할 수 있는 자가 수준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이뤄지게 되는 것이지 '겸손해야지' 한다 해서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다. 가짜 겸손으로 오만함을 덮을 수 없다. 진짜 겸손이어야만 한다. 진짜 겸손할 수 있는 자가 동시에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자이다. 자신을 애써 낮추려는 자를 경계하라. 이런 거짓스러운 자가 오만한 자이기도 한 것인데, 이런 자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나(각자 자신)를 배신하거나 짓밟게 되어 있다. 본인은 자신을 애써 낮추려고 하거나 지나치게 친절한 자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짓스러움이기 때문이다. 진실된 자는 높아지고자 하지 않아도 낮아지고자 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낮은 곳으로 가게 되어 있다.

 

오만과 겸손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초등학생들도 다 알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자, 겸손(진짜 겸손)할 수 있는 자는 매우 드물다. 스스로 깨우치지 않는 앎은 진짜 앎이 아니다. 남이 긁적여 놓은 글귀를 반복하는 것 밖에 못된다. 이러한 것은 아무 가치가 없으나 그러한 것으로 채워질수록 자신이 높아지는 줄 착각하기 쉽다. 낮은 자일수록 자신을 그런 가치없는 것으로 채우려 하며, 점점 채워지면서 자신을 높은 자로 여기는 착각을 하며 오만해진다. 나이 20이 못된 자의 오만함은 애교이고, 20대의 오만함은 봐줄만 하고, 30대의 오만함은 한심하고, 40이 넘은 자의 오만함은 구제불능이다.

 

오만함을 보인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부족함을 보이는 것이다. 이전 쌓은 점수조차도 대폭 깎아먹게 되며 노력해도 잃은 부분을 만회할 수 없다. 그래서 본인은 특히 최고신께 단 한번의 오만함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 스스로 다짐했다. 오만함이라 한 그것엔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과 자신이 한 것을 알아봐달라 하는 마음도 포함된다. 이러한 것은 어느 시기에 이르러 최고신을 찾게되는 이들(본인 포함) 누구나 미리 가져야 하는 바람직한 마음가짐이다.

 

이 글은 특정인을 두고 적은 글이 아니다. 그러니 괜히 민감해 하거나 자신을 자책할 필요없다. 이 글을 자신을 두고 한 말이라 생각하는 자는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자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이들은 이 글이 자신과 같은 이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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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내용은 어떤 이의 질문에 답한 내용이다. 본문글과 함께 참고할만 할 것이라 생각하여 덧붙인 것이다.


(달규) 2019.01.15. 20:33

겸손해지는법 좀 알려주세요 ㅜ


(금빛오오라) 2019.1.16. 00:20

대개 자신을 낮추는 것을 겸손이라고 하나, 그런 것들 대부분이 겸손이 아니라 가식이고 거짓입니다.

겸손은 아무나 되는 것도 아니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겸손할 수 있는 자가, 자신의 부족함과 상대의 높음을 알게 되면 자연적으로 공경케 되며 겸손케 됩니다.

낮은 자는 자신과 같은 낮은 부류의 자를 높게 보고 공경 겸손하게 되며, 가능성을 가진 자는 높은 자를 부분적으로 볼 수 있어 공경 겸손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억지로 하는 것은 되지도 않고 도움도 안 되고 가치도 없습니다.

자신이 성장하여 선악을 잘 분별할 수 있고, 높고 낮음을 잘 가릴 수 있을 때, 자신보다 더 훌륭한 인물 앞에서 자연적으로 겸손케되는 것입니다.


나이 20정도부터 가치를 판단하고 부여하는 자신의 가치관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30정도에 확신이 서고, 40정도부터는 굳어지고 성장하며, 50정도에 익어가고 깊어집니다.


가치관이 제대로 서기 이전에는 자신이 깊지 못해 무엇에 대한 분별을 할 수 있는 안목이 부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자신이 옳다 여기며 자신의 가치가 최고라는 생각을 고집합니다. 낮은 자일수록 그 착각이 크며, 자아도취를 에너지로 하여 살아갑니다.


기본적으로 인간 자신이 가능성이 있어야 하고 경험도 쌓아야 하니 연륜도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이 발라야 바른 가치관이 형성되는 겁니다. 자신이 스스로 형성시킨 자신의 가치관의 잣대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돈과 부에 가치를 두는 자도 있고, 낮은 선함에 가치를 두는 자도 있고, 깨어남에 가치를 두는 자도 있습니다.


높은 자는 낮은 자를 쉽게 볼 수 있으나, 낮은 자는 높은 자를 잘 볼 수 없습니다.

높은 계단에서 아래 계단은 다 보이나, 아래 계단에서 높은 계단에 뭐가 있는지 볼 수 없습니다.

높은 산에서 아래를 보면 훤히 다 보이나, 낮은 곳에서는 직접 가보지 않는 한 높은 곳에 뭐가 있는지 볼 수 없습니다.

낮은 자는 높은 게 뭔지 모르니 높은 자에게 깝칩니다. 가능성을 가진 자만 성장하였을 때 높은 자를 알아보고 자연적으로 겸손케 됩니다.

'겸손하라'는 표현보다 '겸손할 수 있어야 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루시퍼 일루미나티 렙틸리언놈들이 망가뜨린 현세상이 미친 세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자, 아메리카 대조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자가 깨어날 가능성이 있는 자이고, 훌륭한 인물을 알아볼 수 있고 겸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자입니다.


(달규) 2019.1.16. 13:08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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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2.

어느 글에 답한 내용.


어린 자라면 잘 모를 때라 바뀔 가능성이 있지만, 나이 30 정도에선 바뀌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관이 동시에 자신을 가두는 것으로도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 30정도 되면 가치관이 어느정도 세워짐과 동시에 오만함 역시 하늘을 찌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만함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면, 오만한 자는 뭐가 높은 건지 뭐가 낮은 건지 모른다. 낮고 어린 자일수록 지식 등 앎을 높은 것이나 높아짐으로 착각한다. 자신을 모르고 높음이 뭔지 모르니 높은 자의 아주 작은 별 가치없는 것을 어떻게든 흠내려 하거나 트집잡으려 하나, 높은 자는 낮은 자들의 흠이나 부족함이 훤히 다 보이지만 넘어가준다. 얼마나 낮은지 알기 때문에, 흠과 부족함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리하면 남아날 수 없기 때문에, 불쌍히 여겨, 기를 죽이지 않고 성장시켜주려 하기 때문에, 성장토록 기다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너그럽게 봐주고 인내하기 때문에 일일이 안 잡는 것이다. 못해서 하지 않는 게 아니란 거다.


내가 알려주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알아가면서, 내가 알게끔 방향을 잡아주고 정해주고 유도해주는 것들을 알아가면서, 스스로 찾아보고 알아가면서, 어떤 임무나 직책을 맡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높아진 줄 착각하거나 주제를 망각하여 오만해지기 쉽다는 것이다. 신이 가까이 있을수록 가까이 해줄수록 더 그러하다. 그 자신의 문제로서 나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오만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나를 찾아 이곳에 와 성장해가는 자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자신도 알게 된다 해서, 내가 하는 말을 자신도 하게 된다 해서 높아지는 게 아니다. 어리고 낮은 자일수록 지식과 앎을 높아짐으로 착각한다 했다.


알고 있는 것도 코딱지만한 앎 뿐이며, 앎이란 것도 깨어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생각이 자라기 시작하는 20세 정도부터는 물론 이제 조금 알게 되는 30세 정도 역시 시작에 불과하다. 나이들수록 성장하며 깊어진다. 동시에 자기생각 자기고집 갇힘 등도 역시 그만큼 점점 커진다. 그래서 나이 든 자일수록 바뀌지 않는 것이다.


내 말과 훈계를 받아들이는 것도 자신의 한계까지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저 유튜버가 내 말을 받아들이겠냐. 그것이 오만함인 줄 그 자신이 어찌 알겠냐. 이곳에서 내 잔소리나 훈계를 들을 수 있는 자체만 해도 너희들에겐 큰 복이다. 누구든 망각하지 마라는 것이다. 기죽을 필요는 없다.


루시퍼 서양왜구놈들이 하느님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세상을 지배하여 인권과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것으로 세뇌시키고 망쳐와 세상의 질서가 다 무너진 것이다. 서양왜구놈들에게 세뇌되고 물든 개돼지들은 자신이 무슨 대단하거나 소중한 줄 알고, 뭐가 높은 건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버르장머리도 없고 오만함은 하늘을 찌르니, 바닥으로 추락한 이 세상의 질서와 인륜과 도덕과 예를 다시 세울 것이다. 예라는 것은 공자의 예와 같이 개돼지들의 눈높이에 맞춘 억지적인 예가 아니라, 높음을 알고 높음을 쫓고 공경하는 예로 새로 세워질 것이다. 그럴려면 먼저 시천주(하느님을 섬김)가 질서로 제대로 잡혀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