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똥철학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금빛오오라 2008. 9. 26. 14:13

2004. 6. 24. 작성.

 

나에게만큼 남에게도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진심으로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배려라는 것은 큰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수십번씩 일어나며 겪게되는 것인데, 배려란 내가 하고자하는데로 하는 것이 아니며, 무의식화되어 생활에서 자연적인 행동과 언행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본다. 아주 자연스럽게 몸에 베이도록 하고 싶다...

일상 생활습관에서 보여지는 작은 것을 보면,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얼마나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우유를 마셔도 뒷맛까지 깊이 음미를 하는가.
슬리퍼를 신어도 시끄럽게 질질 끌지 않는가.
걸음걸이가 투벅투벅 거리지 않는가.
실내에서 걸어도 아래층에 울리지 않는가.
시끄러운 음악이 나오는 해드폰을 끼고도 대화시 목소리가 커지지 않는가.
무의식적으로 트림이나 제치기를 해도 순간적으로 머리를 돌릴 수 있는가.
음악성이 있으며 대개의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작은 소리까지 민감히 들으려 노력하는가.
문을 잠글 때 탁탁~소리내지않고 잠글 수 있는가.
문을 닫을 때 쾅쾅~ 소리내지않고 닫을 수 있는가.
여닫이문에서 무조건 밀고만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가.
노래소리 큰박자에 박수치는 것이 아니라 노래의 반주에 맞춰지는 북소리에 박수를 치는가.
벨을 여러번 누르지 않고, 한번만 누르고 기다려줄 수 있는가.
규정이나 법과 상관없이 운전시 웬만해서 경적을 울리지 않고, 보행자나 상대 차량에게 양보하는가.
보행시 반대편 사람과 마주칠때 자기방향만 직선으로 고집하지않고 옆으로 살짝 비켜줄 수 있는가.
나의 우산을 남이 모르고 가져가더라도 나는 또 다른 사람의 우산을 의도적으로 가져가지 않고 그냥 비맞고 걸을 수 있는가.

남을 배려하는데 노력을 한다면 아마 실속까지 챙기기는 어렵겠지.
남의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이상으로 크며 부자연스럽다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 수도 있겠지...

남을 배려하는 것이란...
아주 자연스러워야하며 무의식화 되어야 할 것이며, 자신이 남을 배려한다고 해서 다 배려는 아닌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상대방이 느끼는 만족도가 아닐까. 그것에 대한 자신의 배려가 진정한 배려가 아닐까.
배려라는 단어에 얽매인다면 이미 진정한 배려는 아닐듯...
그리고, 상대에 따라서도 다를 수는 있을 것이다만 큰 것은 아닐 것이다.

크게봐서 남을 잘 배려 할 수 있는 사람이 전세계 인구의 절반이 된다면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지는 않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여닫이문에서 미는 것은 쉽지만 당기는 것은 쉽지가 않아.
(물론, 기본적으론 안에서는 밀고 밖에서는 당겨주는 것이 통상적인 예의이다.)
대개 미는 것에만 익숙해져있어서 양쪽에서 서로 밀다가 힘센사람이 밀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지.

반대편에서 사람이 미는지 당기는지 확인하고 가급적이면 불편하더라도 자신이 미리 당겨주는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단순산술적인 오류가 있지만, 미는 사람이 반이면 당겨주는 사람도 반은 되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위에 적었던 것은 남을 배려하게되면 하나씩 하나씩 나타나는 성적표가 될 수도 있겠다만, 글로는 표현하기 힘들고 말로도 알아듣기 힘이드니 배려라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가 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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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3.8.

이 글은 작성 당시 인간들이 배려심이 너무 없어서 그것에 괘씸해 하여 적은 글이다.

제목에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은 사실은 내가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들이 워낙에 배려심이 없어서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라"고 그들을 꾸짓는 것이다.

"내가 진심으로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것도 남을 조금이라도 배려하는 사람을 한 명도 못봐서 괘씸해서 한 말이다.

둘러서 한 말이란 게다. 자기 밖에 모르는 염치없는 개돼지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