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똥철학

마음을 다스리는 법(상처받은 마음 스트레스 줄이기)

금빛오오라 2012. 2. 21. 10:18

글을 적기 위해 어떤 생각에 깊이 빠져 있으면 같은 생각이나 같은 고민을 하는 이, 혹은 글이 필요한 누구에게서 메일이나 쪽지가 오게 된다. 역시 이번도 어김이 없다. 이것을 일부에선 유인력이라고 하는데,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깊이 없는 편협한 시각의 표현방법이다. '통함'이 맞는 표현이다. 주파수가 일치되어 서로 연결되는 것이지 끌어들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억지스럽다. 방송국에서 쏘는 전파와 같은 주파수로 안테나를 맞추면 서로 일치되는 개념이지 흡입하듯 끌어들이는 개념이 아니다.
이 글은 한심한 이들로부터 상처를 받은 이들을 위한 글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반복되는 트러블을 통해 성숙되어 질 수 있는데, 이때 마음 다스리는 법이 필요하며 중요하다. 마음 다스리는 법이라는 것은 매우 넓겠으나 인간관계에서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방법과 요령을 말하고자 한다.


때론 모가 난 부분이 둥글어지고 둥근 부분이 모가 나게 된다. 둥근 것이 좋은 것이 아니며 모 난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절대법칙이 없다. 세상에서 좋고 나쁜 것으로 구별되어지는 것은 인간의 마음뿐이다. 모 나지 않은 둥글둥글한 인간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편협한 억지이니 소중한 자신을 그것에 애써 맞춰 갈 이유는 없다.


수양 된 사람은 둥근 부분과 모 난 부분이 바르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지 없는 것이 아니다. 바둑판을 만들 때 구석의 모를 정확한 위치에 잡고 반듯하게 할수록 잘 만드는 것이다. 수양이 부족한 사람은 모가 난 것이 제 자리에 위치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쪽으로 쏠려 편협해지게 된다. 인간 모두가 수준이 되거나 하나로 뜻이 모인다면 그 '모'라는 것은 서로를 더 잘 맞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톱니가 정확히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마냥 둥글기만하다면 서로 맞물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옛 성인들을 마냥 참아주기만 할 것이라는 모 나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선 안 된다. 그런 인내를 닦임의 정도나 마음 다스림으로 연결시켜서도 안 된다. 성인에 대한 환상은 종교에서 꾸며 왜곡한 것 중 하나이다. 권력을 잡은 세력가는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했으며, 신심을 부추겨 자신과 신을 동일시하는 작업으로 충성심을 만들었다. 덕분에 신과 성인에 대한 이미지는 그들이 바라는 대로 지극히 이상적인 존재로 왜곡되어 만들어졌다. 무지한 인간들은 자신의 소중함을 잊은 채 신에게 경외감을 가지게 되었고 세력가에겐 순종하게 되었다. 성인이라 하는 이들의 행적에 대해 꾸며대고 부풀려서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처럼 만들었다.


종교는 무조건적인 인내와 사랑 자비만이 마음 다스림의 결정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인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나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는 것이 도의 경지인줄 아는 착각은 버려야 하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무지함 역시 일찍 버릴수록 낫다. 과거 성인분들이 마냥 둥글기만 한 분들이 아니며, 분노도 하고 화도 내고 지적도 하고 꾸중도 하고 웃기도 하고 울 줄도 아는.. 평범한 인간들과 같다. 다만, 그 어떠한 것도 바르다는 것이다. 후대에서 바라는 성인의 상으로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왜곡된 이미지로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다.

 

추악하고 편협한 자들은 횡포를 부리면 되고 상처받은 이는 마음을 다스리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인 것은 추악스러움은 없어져야 하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며 상처 받은 이들은 자신을 위해서 마음 다스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두환이를 보살펴 준 백담사 주지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성인을 언급한 것이지 그들을 목표로 여겨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 성인분들을 본보기로 여기는 것은 괜찮다. 단, 스스로 마음 다스림에 노력치 않는 자들은 그런 성인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고 그들을 목표로 삼아야 된다. 단순히 남을 사랑하라 라고 하면 사랑하려 노력하고, 탐욕하지 마라 라고 하면 탐욕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면 된다.


인간은 누구나 하루에도 여러번 다른 사람과의 직간접적인 충돌을 경험한다. 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런 기억들.. 이것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없애거나 다소 완화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자신의 마음 다스림이다. 마음 다스림의 방법을 잘 모를수록 고통의 기억은 되새김질되고, 오히려 스스로 점점 더 크게 만들어 가는 경우도 많다.


종교인들이 '내게 고통을 준 상대를 용서하라' 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것은 50점일 뿐이며 그는 마음공부를 더 해야 한다. 용서하라~ 용서하라~ 라고 하지만 무작정 용서는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억지스럽고 무책임한 권유에 불과하다. 정작 용서하는 마음을 먹었다해도 마음의 짐으로 남게 되고 화를 돋구게도 된다. 용서라는 것은 그 당사자의 선택에 맡겨야 하며 자신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줘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남녀의 다름에 대해 '차이를 서로 인정하라고 하는 것은 50점일 뿐이다' 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차이에 대한 바른 이해') 차이를 알게 되면 이해하게 된다. 차이를 알려는 노력을 하고 넓은 시각과 깊은 마음이 있다면 자연적으로 이해하기 마련이다. 표현하는 단어 하나의 차이에도 깨우침의 깊이는 쉽게 드러난다. 차이를 인정해야 되는 것보다 이해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게 문제해결을 위해서도 훨씬 낫다. 차이를 깊이 있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정이란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며, 단순히 차이를 인정하라~ 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라~ 라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또, 열린 자는 차이를 모르고 있었다 해도 차이를 발견하게 되면 이해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부모의 시각, 신의 시각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


다른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면, '나라면 그러지 않는다. 내가 너라면 나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나의 입장과 상대의 입장을 번갈아서 비교해보는 노력의 하나이다. 이런 사고는 역지사지와 같은 마음이다. 상대의 입장에서 보려는 노력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더 잘 받게도 된다. 이러한 이들일수록 마음 다스림의 중요성은 더 크다. 이런 이들이 전두엽의 기능이 더 발달되어 있다.
상대와의 트러블은 매일 일어나고 수시로 저울질을 해댄다. 남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큰 사람일수록.. 그것에 더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이것의 회수는 더 잦을 수 있다. 상대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자일수록 나를 상대의 입장에 서서 보려하니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상대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자일수록 상대의 입장을 찾지 않으려 하니 자신 안에 더 갇히게 되고 점점 이기적이고 편협해지게 되어 남에게 상처를 많이 준다.


지극히 상대방의 입장에서만 생각해 보면 나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보잘 것 없는 작은 이유라 하더라도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지 못했다면 지극히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는 시각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의 시각으로 보려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된 자는 무엇을 찾을 것이고 되지 못한 자는 찾지 못하거나 찾았다고 해도 찾아 낸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이 바늘구멍과 같이 작다하더라도 상대의 시각으로 나를 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 보면, 모두 납득되진 않아도 티끌만큼이라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의도적이지 않은 사고이다.
아무튼 그것을 찾았으면 됐다. 작은 어떠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작게 본 것이고 상대는 그것을 크게 여겼음을 알게 된다.


비록 그것이 한심할 정도라 해도 한심한 상대의 입장으로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 한심한 상대를 이해해주는 마음마저 필요하다. 내가 한심해 할 정도의 상대의 작은 이유 외에 상대가 중요하게 여길 만큼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열어둬야 한다. 나는 물론 상대의 입장에서도 지나치게 민감히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은 나를 버리고 상대의 가치와 존재만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나에게 집착하고 있는 자신의 시각은 잠시 버려야 한다는 것이며, 누가 잘나고 못났음을 가리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의 설명이다.

 

이때 부모와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 이때 신과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 티격태격하는 철없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시각, 아주 높은 신의 세계에서 아옹다옹하는 인간 세계를 내려다보는 신의 시각이 필요하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구체적인 것에 비유한 것일 뿐 정확히 이 시각이라고 할 순 없다. 바른 부모의 시각과 바른 신의 시각 역시 말하고자 하는 시각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러한 시각에 대한 감을 잡아야 한다.


상대의 입장에서 나를 보는 시각에 부모나 신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은 시각을 함께 가지게 되면 작은 부분이라도 상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 편협해질 수 있는 주관적인 시각에서도 다소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주관적인 시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나의 관점에 매달리기만 하는 것에서 벗어난다는 뜻이지 주관적 시각을 버려야하는 것, 혹은 가치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주관적인 시각이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가치를 구별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소중한 것이니 주관적인 시각을 홀대해선 안될 것이다. 물론, 편협한 이들의 주관적 시각은 보잘 것 없고 가치 없다. 상대를 잘 배려하고 잘 이해하는 사람일수록 편협하지 않고 넓고 바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배려와 편협하지 않음은 동시에 오며 근본은 바른 마음이다.

 

마음이 바르지 않은 자는 편협하며 이 편협함으로 모든 사람, 모든 사건, 모든 사물을 바라본다. 어떠한 한가지에 대해서라도 편협함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모든 것이 편협할 가능성이 높고 마음이 바르지 않은 자이니 이런 자를 멀리하라. 편협한 이 중 자신이 편협하다는 것을 아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세상만사를 바로 볼 수 있는 자가 자신 또한 바로 볼 수 있는 자이다. 이 둘은 둘이 아니다. 마음이 바른 자가 편협하지 않고 값진 진리(진실)를 찾게 된다. 교육과 수행, 삶의 자세의 핵심은 바름이어야 한다. 이것을 갖추면 모든 것이 진실적이다.


용서하기 위해 크고 넓은 시각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고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면 상대가 그러했던 매우 작은 이유라도 찾게 되는데 그리하면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가 한심하게도 보일 것이고 초라하게도 보일 것이고 불쌍하게도 보일 것이고 생각했던 만큼의 잘못이 아니었음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 그것에 매달리는 본인도 한심한 상대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생각해 보게도 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은 매우 다양하다. 단편적으로 대입하려 하지 말고 자신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의 과정에 대한 틀을 잡고 이해함이 바람직하다. 자신이 찾아낸 정도에 따라.. 자신이 노력한 정도에 따라 고통스런 기억의 아픔은 줄어들 것이다.


당장은 스트레스를 심각히 받고 있다 여기는 것도 세월이 지나 돌아봤을 때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고 살아가면서 일어날 수 있는 작은 해프닝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다. 당시엔 심각했던 수치, 모멸감, 고통 등도 나중엔 웃어넘길 수 있는 추억거리가 되는 경우도 많다. 당장의 스트레스에 과도하게 매달려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 현재의 시각이 아닌 미래 자신의 관점으로 현재를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 어차피 평생 갖고 갈 정도의 고통의 기억이 아니라면 미리 없애거나 최소화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지혜이다.


이것이 가능한 사람은 자신이 받는 스트레스를 줄이거나, 자신 스스로 키워 가는 것을 더 이상 만들지 않을 수 있다. 마음을 다스린다하여 경전, 좋은 말씀, 성인의 흔적을 억지로 따라갈 필요는 없다. 마음 다스림에 노력하지 않는 자나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성인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거나 종교 안에서 배우며 성장하는 게 낫다. 단, 깊이는 가질 수 없다.


문제해결을 위해선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려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기억나도 되게끔 바꾸는 것이며 서서히 자연적으로 잊게도 된다. 그러기 위해선 기억을 지우려고만 하지 말고 들춰내어 용기 있게 더 파고들어야만 한다. 고통이 되새김질되고 스트레스가 줄어들지 않는 것은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머무르는 기억이 얕게 반복되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한 트라우마도 마찬가지인데, 억지로 기억을 지우려하지 말고 그것에 더 깊이 파고들어 가서 자신이 만들어 낸 왜곡된 부분을 찾아야 한다. 이것을 스스로 찾지 못할 때는 최면과 같은 외부의 반강제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상쇄시켜주는 방법을 쓰게 된다. 트라우마를 가지는 이들은 대상에 평소 미리 접할 기회가 잘 없었거나 스스로 멀리했을 것이다. 평소 자신을 조금씩 노출시키는 것도 면역력을 키우는 방법이 된다. 그러니 자신이 만든 벽에 갇히지 말고 접해 보는 모험정신과 도전정신이 필요하다. 사람 살아가는 것도 고통 없이 편하고 넉넉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잘 사는 것이 아니다.


백신의 원리가 바로 그것과 동일한데, 내 몸이 이겨낼 수 있을 만큼의 바이러스나 세균을 집어넣어 자가면역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미량의 백신조차도 이겨내지 못하는 정도의 면역력일 때는 최소 면역력을 회복한 후로 미룰 수밖에 없다. 평소 자신의 마음 다스림에 게을리 하지 않는 자, 혹은 마음 다스림의 방법을 아는 자는 그 어떠한 바이러스에 대해서도 면역력이 탁월하다 할 수 있다. 그러니 경험하지 못한 어떠한 바이러스에 대해서도 이겨낼 수 있는 나름의 안정장치를 항상 가지고 있다 볼 수 있다. 마음 다스림이라는 것은 탁월한 정신적 면역체계를 갖추는 것과 같다. 세균은 병든 자를 찾아다닌다. 내 마음을 스스로 병들게 하지 않는다면 세균은 나를 이길 수 없다.


비슷한 원리의 예를 들어보자면..
금연을 하려고 한다면 담배와 재떨이를 밀치고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접하게 되는 기회는 반복적으로 오기마련이니 욕구는 그때마다 다시 일어나게 된다. 이 욕구라는 것은 위에서 말한 고통의 기억과 같다. 이 욕구 자체를 없애야 하는 게 필요한데 그러려면 오히려 깊이 파고들어야만 한다. 담배를 눈 앞에 두고 담배 피우는 자신을 상상하고, 매캐한 연기에 숨이 막히고 가슴이 아파 오는 것도 상상하고, 기운이 빠지고 힘없는 자신을 상상하고 느껴본다. 담배에 정이 떨어질 때까지 파고들어 가야 한다. 자극적일수록 더 낫다. 그럼, 이후 담배를 볼 때마다 생길 수 있는 욕구와 충동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성에 대해 집착케 되는 때도 마찬가지이다. 어떠한 것에 대한 집착도 이러한 방법으로 스스로 씻어낼 수 있다. 그 외 여러 경우에도 원리는 그리 다르지 않다. 다만 자신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 지 모르고 있다는 게 문제가 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담배를 끊는 것 등의 방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 다스림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억지로 하려들지 말고 차근차근 깊이까지 들어가서 찾아야 할 것을 찾아서 스스로 풀어내야만 한다. 이때 평소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나 상상을 자주 하는 사람이 더 유리할 수 있다.


어떠한 것에 대해 이루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을 상상하는 이상적 생각을 현실적 생각에 덮어씌우는 게 도움이 된다. 공상을 잘 하고 비현실적이라고 하는 이상지향적인 사람이 이 기능은 더 뛰어나다. 이상과 현실의 접목은 나쁜 것이 아니며 애써 구분지을 필요도 없다. 현실적인 게 좋고, 이상적인 게 나쁜 게 아니다. 단, 현실적인 것을 물질에 집착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거나 현실을 비이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이, 이상적인 것을 뜬구름 잡는 것으로만 알고 있거나 이상을 비현실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이가 문제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수도자가 있다면 자신의 편협함이 어디서 왔는지 찾는 노력부터 하고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라.
그럼 현실과 이상이 균형을 이루는 게 가장 좋은 것이냐. 이것도 아니다. 좋은 것은 현실이든 이상이든 균형이든 바른 것이다.


이렇게 여러가지로 파생시키는 상상력 또한 나쁜 것이 아니다. 위가 뒤틀어질 정도로 생각을 깊게 해보고 상상도 해 보라. 자기 전 온갖 잡생각이 들 때도 그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디까지 가는지 밤도 새 보라. 그것이 깊이를 주고 힘이 되어주기도 하니..
본인이 오래전 트레일러 운전면허를 따려고 했다. 가진 것은 자존심밖에 없고 학원 다닐 돈도 없고 차도 없고 시간도 그리 넉넉지 않았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봤다. 트레일러 면허시험은 다른 것과 달리 정해진 공식이 그리 없다. 감각과 경험의 비중이 많이 차지하는데 트레일러 타 본 경험은커녕 운전석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조차 없다. 그래서 작은 모형을 만들어 기본원리를 이해했고, 자기 전 동영상을 본 기억을 떠올려 상상했다. 막연히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운전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마음으로 영상화해서 하루 30분씩 1주일을 반복했다.

 

시험 당일 차에 올랐다. 수십톤이나 되는 큰 차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편안했다. 자기 전 해왔던대로 그대로를 재연했다. 한번에 합격해버렸다. 나중에 함께 시험을 본 친구와 얘기를 나눴는데 그는 처음부터 위압감에 눌려 울적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는 결국 포기했다. 그는 평소 큰 차에 대한 두려움의 기억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본인이 합격하는 결과에 대한 상상을 한 적은 없었다. 아무튼 자기 전에 했던 상상이 현실에서의 두려움과 벽을 무너뜨리고 그대로 재연 가능하게끔 익숙한 틀을 만들어줬다고 생각한다. 자기최면 효과도 있었을 것이라 보는데 자기최면 역시 마음 다스림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예를 그대로 기억하기 보단 원리로 이해하면 응용의 폭도 넓어지고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상대에게서 받은 충격이나 고통에 대한 자기 스트레스를 줄이려는 마음 다스림의 원리에서 파생되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한 것들은 스스로 찾아야 할 것이다. 많은 것들이 있겠으나 원리적인 면에선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를 알면 다른 것도 알 수 있게 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도 찾을 수 있게 된다. 자신이 받은 마음의 상처와 불필요하게 자신이 만들어내는 고통을 줄일 수 있으니 마음 다스림의 지혜는 필요하다. 수도자라면 상처를 깨우침으로까지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고통스럽더라도 기억을 끄집어내어 깊이까지 파고들어 내게 아픔을 줬던 상대의 시각에서 나를 보며 보잘 것 없는 이유를 찾아내고 넓고 큰 시각으로 전체를 본다. 그러면 아픔은 누그러들고 남아있는 고통스런 기억은 이전에 비해 작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커진 자신의 그릇도 함께 보게 될 것이다. 생소하게 들린다면 평소 생각을 많이 하라. 고통을 씻으려는 떠올림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것을 위해 소요되는 자신의 인내를 의심하지 마라.
이것이 어렵다면 평소 사소한 것은 무시해버리고 홀로 간직하기가 벅찬 것은 자신을 이해해주거나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어떤 이에게 털어놓는 것도 방법이 된다. 역시 이때에도 최소한의 자기 마음 다스림이 필요한데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신의 소중함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의 상처라는 것을 잘 활용하면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주고 성숙시켜주니 마음의 상처를 나쁘게만 여길 이유는 없다. 어차피 지난 과거라면 내 고통을 최소화하고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도 내게 도움이 되게끔 전환해주는 게 필요하다. 그래서 마음 다스림이 중요하다.
자신의 그릇이나 수양정도에 따라서 커버할 수 있는 정도는 다르지만 심각한 수준의 것까지 모두 마음 다스림으로 해결된다고 한다는 건 너무 잔인하다. '모든 것은 마음 안에 있다.' 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가지지 않는 이들과 편협한 이들이 근본적으로 문제인데 이들은 마음 다스림과는 거리가 멀고 이런 류의 글에는 관심도 없다. 골 빈 자는 껍데기에만 에너지를 쏟고 껍데기만 보고 열광한다. 안되는 인간은 안 된다. 이 글은 자신의 잘못을 남의 잘못으로 여기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죄책감이나 반성조차 없는 가치 없는 이들을 제외한 상처 입은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글이다.
이 글을 끝까지 본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소중하고 발전가능성이 있는 가치 있는 존재이니 자신을 과소평가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언어라는 것이 부풀리고 그럴듯하게 보이게끔 하는 것은 쉬워도 그대로 표현하기란 참 어렵다. 마음이라는 것은 보이거나 잡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이 글을 보고 스스로 노력해서 깨우쳐 이미 다 알고 있던 것이라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수준에 충분히 오른 자이니 마음수양과 관련된 글을 더 이상 찾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