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똥철학

이해와 인식과 깨우침

금빛오오라 2014. 6. 29. 00:11

이해는 아는 것이고, 인식은 느끼는 것이고, 깨우침은 영혼이 감응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해는 앎의 과정이며,
인식은 자기화하는 과정이며,
깨우침은 표현되는 과정이다.

이해는 머리로 알게 되는 것이고, 인식은 몸과 마음으로 느껴 알게 되는 것이고, 깨우침은 영혼을 감응시켜 알게 되는 것이다.
이해는 사과가 맛있다는 것을 말로 들어 알게 되는 것이고, 인식은 사과 맛을 느껴 알게 되는 것이고, 깨우침은 사과의 존재의 목적과 이유까지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앎이 앎이 아님을 모르는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진짜 아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것이든 머리로 이해하려는 자일수록 지식에 갇혀 있고 깊이가 얕고 오만하다. 이러할수록 어떤 사물의 본질이나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기 어렵다. 세상 만물을 보는 안목과 자신을 보는 안목은 같은 것이니 그러한 자들은 자신의 그러함 역시 알 수 없다.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고, 낮은 곳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지식이나 앎은 인식의 과정을 넘어 깨우침으로 이어져야 그 가치가 있는 것인데, 대부분이 인식은 커녕 지식습득에 모든 가치를 둔다. 공부를 매우 잘하는 자가 깨우침에 이르기 어려운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깨어날 수 있는 자는 공부에 그리 관심이 없게 되어 있다. 공부를 매우 잘 하는 자들은 공부에 갇혀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의 수준을 지식의 정도로 판단하나, 인간의 수준은 지식이나 학벌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지식은 가장 낮은 단계에서만 최소한으로 필요할 뿐이다. 물론, 수준에 오르기 위해선 많은 것을 알아야 하지만, 대개는 지식습득에 갇혀 있다. 정작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무엇이 목적인지를 모른 채 별 가치없는 것에 집중하고들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그러한 데에는 사회적인 시스템에 갇힌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하고, 자신의 수준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순수한 목적의 앎은 충분해야 하나, 가치없는 지식과 학벌 등을 자랑으로 내세우지 마라. 개돼지 대중들은 그것을 우러러 볼 것이나 깨어난 자에겐 한심하게 보일 뿐이다. '나는 가치없는 것에 갇힌 자입니다. 성장하지 못하는 수준의 한계입니다.' 라고 내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회로부터 자신으로부터 세뇌되고 갇힌 낮은 수준으로 인간이나 세상을 보니 당연히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이해와 인식과 깨우침의 과정에서, 이해를 인식으로 착각하기 쉽고, 인식을 깨우침으로 착각하기 쉽다. 낮은 자일수록 낮은 영역에 가치를 두게 되어 있고 깨우침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이해에 가치를 많이 둘수록 인식의 단계에 오르기 어렵고, 인식에 가치를 많이 둘수록 깨우침의 단계에 오르기 어렵다. 충분히 바르게 성장한 자가 어떠한 과정에서 영혼이 감응되어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지 누구나 한다 해서 오는 게 아니다. 여기서 성장이란 육체적 성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 성장을 말하는 것이다. 육체적 성장과 달리 정신적 성장은 오직 자신의 바른 마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깨우치려면 기본적으로 앎의 단계가 충분해야 하는데, 앎의 단계라는 건 대개 말하는 수많은 불필요한 지식이나 정보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인간들이 소중히 여기는 지식들은 별 소용없는 가치없는 쓰레기들이다. 인간들은 그 자신이 물질에 가치를 두고 낮은 영역에 집착하니 무엇이 소중한지를 모른다.

깨우침의 단계에 오를 수 있으려면, 영혼이 맑아야 하고, 생각이 발라야 하고, 마음이 따뜻해야 하고, 가치관이 발라야 하고, 수준까지 갖춰야 한다. 인간의 하찮은 지능과 얄팍한 지식과 껍데기를 보는 것으론 불가능하다. 악한 자, 더러운 자, 이기적인 자, 인색한 자, 탐욕스런 자들은 불가능한 것이다.

세상 모든 인간들이 자신이 옳은 줄 안다. 그만큼 모든 인간들의 수준이 낮다. 자신 안에 갇혀있는 것이다.
악과 더러움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공자왈 맹자왈 한다 해서, 종교 안에 있다 해서, 신에게 기도한다 해서 깨우침이 되는 게 아니다.
깨우침이란 세상을 진정 이롭게 할 수 있는 자질과 수준을 갖춘 자의 마음과 행이니, 자신이 어느정도의 수준과 마음이 되지 않고선 깨우침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깨우친 자를 알아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깨우침이라는 것은 궁극의 단계는 아니고, 인간이 근본적으로 옳은 방향으로 크게 변화하는 것인데, 그럼 그 방향과 목표지점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다. 북두칠성이 하느님이다. 북두칠성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자신과 같은 마음을 심어주셨다. 그러니, 깨우침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심어져 있는 신과 같은 마음을 스스로 찾은 단계라 할 수 있다. 영혼이 깨어나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깨우침은 글이나 말로 표현되기 이전에 세상을 구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단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꼭 글이나 말을 거쳐 깨우치는 게 아니다. 순국선열들 모두가 깨우친 자는 아니나, 그나마 인간들 중 근접한 자들이다. 깨우침의 깊이도 다 다르다.

이해와 인식은 타에 의해서도 가능하지만 깨우침은 오로지 스스로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외부환경은 자극제일 뿐이다. 깨우침의 정도는 북두칠성 하느님의 마음에 얼마나 가까이 가 있냐와 같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자 도(道)이다.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가장 바른 길이다.  그러니, 진정 깊이 깨우친 자는 신을 알게 되어 있고, 보이지 않는 정신계도 인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신의 파장권에 들었기 때문이고 신에게 가까이 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이르지 못한 자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순국선열들의 마음이 바른 것이나, 그들을 깊이 깨우친 자들로는 볼 순 없는 것이다. 깨우침에 깊이가 있는 자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만큼의 뜻을 갖고 있고 행하려고 한 자에겐 신이 이끌어주며, 신을 갈구함에 응하기도 한다.  신이 모든 인간들의 마음을 다 꿰뚫고 있고, 깨어날 자들을 훑어본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 알고 있는 순국선열들은 그 정도의 자들은 아니다. 악과 더러운 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을 뒤엎어 세상을 바로 세우고자 했고, 신을 바로 알고 있었던 동학 최수운과 같은 자들이 그나마 신에 가장 가까이 올라왔던 깨어난 자들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최수운을 이끌어주고 그의 갈구함에 응했던 것이다.

자신의 깨어남을 목적으로 삼아선 안된다. 깨어나고자 노력을 한다해서 깨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바른 생각과 바른 마음에 의해 자신의 영혼이 바르게 성장하여, 어느 환경과 시기를 만나면 깨어남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 깨어남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깨어남을 쫓으라는 건 아니다. 무엇을 억지로 하고자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인간이 자신이 옳고 자신이 높은 줄 착각하지만, 깨어나는 것은 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 것이다. 각자 한계가 있다. 극소수만 그리 높지 않은 수준까지 겨우 가능한 정도이다.

낮은 자일수록 되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게 되어 있다. 그러한 뜻과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와 같은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낮은 자는 추구하는 바, 관심의 대상, 가치의 기준이 낮기 때문이다. 파장권 자체가 다르다. 어느정도 잠재성을 가진 자만이 부분적으로 알아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이 자신의 깨우침에 자극을 줄 수 있으나, 깨우침은 자신 스스로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다. 사회적 상황 등 어떤 극에 달하는 상황에 닥쳤을 때, 그런 외부의 환경이 자신이 깨어날 수 있게 자극해준다. 악의 치밀한 계획까지 간파하고 있는 신계에서 깨어날 수 있게 이끌어준다. 곧 극에 달하는 상황이 오게 된다. 신에 가까운 자들이 깨어나 악을 물리치고 세상을 바로 세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