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똥철학

흥선대원군은 존경받아야 할 개혁가이다.

금빛오오라 2008. 9. 26. 18:05

2007. 8. 24. 작성.

 

다수가 흥선대원군을 국제정세에 어둡고 개방의 대세를 외면한 쇄국론자로만 알고 있겠지만, 그는 개방에 적극적이었으며 내부론 비리, 부정부패와 홀로 싸운 외롭고 의로운 개혁가였다.

 사진1: 흥선대원군 1820-1898
 자료출처: KBS HD역사스페셜 59회 '흥선대원군은 왜 개혁가인가?' 영상캡쳐

당시 왕실의 권위란 것은 없다시피했다.
당시엔 노론세력의 안동김씨에 의해 국정이 좌우되었다.

극심한 당파싸움으로 반대세력을 모함하고 몰살하여 왕권교체되는 것이 반복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때였다.

나라의 발전과 안녕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권세를 누리기위해 당파싸움에만 급급했던 세도가들에 의한 세도정치로 조선후기는 이미 심각히 썩어 있었던 것이다.

순조의 며느리이자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는 철종이 승하하자 흥선군 이하응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의 둘째아들 고종을 즉위시킨다. 이때부터 흥선군 이하응이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이 되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이미 세도가들에 의한 혼란과 당파싸움에 의한 국력약화를 잘 알고 있었던 대원군은 집권하자마자 세도가들의 척결에 나선다.

세도가에 빌어붙어 부정을 일쌈은 자들을 팽형(사람을 가마에 넣고 삶는 시늉을 하는 처벌)에 처했으며 이로서 지방수령들은 더 이상 부정한 짓을 저지르지 못하게 되었다.
부패와의 전쟁은 인사계혁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세도정치로 소외되었던 북인과 남인을 고루 등용하였다.
과거제에서 조선 건국이래 유래가 없었던 파격적인 인사도 단행하게 된다.

인사개혁이 어느정도 마무리 되어가자 안동김씨의 세력을 약화시키기에 이른다.
당시 안동김씨의 권력도구였으며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던 비변사를 대원군은 폐지시켰다.

문무간 차별을 없애고 무신들에게도 권한을 부여하게 된다.
무신중용정책으로 연합사령부 삼군부를 만들어 군제개혁을 하였다.
문무의 균형을 맞추고자 국방은 삼군부에서, 정치행정은 의정부에서 담당하도록 했다.
그동안 누구도 해내지 못한 혁신이었다.

노론세력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뜻에 따라 세워진 만동묘를 중심으로 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사상적 구심체로 삼았다.
만동묘는 1717년 임진왜란때 지원군을 파견한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기리기위해 건립한 사당이다.

죽은 송시열을 위해 세운 서원이 화양동서원이다.
화양서원 제일 위쪽에 만동묘가 자리하고 있다.
만동묘, 화양동서원을 중심으로 노론세력들이 정치적 사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사상적 구심체로 삼았던 공간이었다. 노론세력 유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성지였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당시 세도가들의 횡포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잘 기록되어 있다.

 

 사진2: 황현(黃玹) 1855-1910
 자료출처: http://ipcp.edunet4u.net/~koreannote

당시 세도가들을 여우와 쥐에 비유해 비하하며 수령들조차도 그들을 두려워해 감히 어찌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화양서원은 백성들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제사비용을 백성들에게 강제적용하였으며, 지정한 액수를 내지 않을 때는 붙잡아 곤장을 치고 고문을 했다.
수탈과 횡포는 정조임금때부터 이미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역대 어느 임금도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신정왕후의 지시로 만동묘를 철폐하기로 선언하였으며, 유생들의 반발에 대원군은 대보단에서 잘 받들겠다고 구슬리며 제사까지 지내줄 것을 제안했다.

만동묘철폐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암시했다.
우리나라 서원의 역사는 1543년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원은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인물을 기리고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는 사설교육기관이었다.
명종임금이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리면서 백운동서원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사액서원에는 여러가지 특권이 주어졌다.
나라에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이리하여 서원의 성격은 바뀌게 되었고 서원건립이 유행처럼 확산되었다.

조선후기에 안동지역에만 서원이 21개 세워졌고 전국적으로 1000여개에 이르렀다.
서원이 점점 권력기관화 되어가는 것이 큰 문제였다.

고종5년 대원군은 서원을 망국의 근원이라 선언하고 사액서원을 제외하곤 모든 서원을 철폐하라 지시한다.
그리고 3년뒤에는 사액서원마저도 47개만 남기고 모두 없애라고 지시한다.
송시열을 모신 大老祠(江漢祠)를 남겨둔 것은 노론세력의 반발을 고려한 상징적 조처였다.

유생들은 격렬히 항의했다. 서원철폐에 대한 집단상소로 대원군을 압박했다.
관철되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맞섰다.
흥선대원군은 단호했다.
흥선대원군 왈'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해도 난 용서하지 않겠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직전인 1862년 한해에 일어난 민란은 경상도에서부터 시작하여 공식적으로 집계된 것만 일흔한곳이나 된다.
세도가들의 횡포는 심했고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던 것이다.
농민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징수를 했고 관리들은 환곡제도를 이용해 수탈하기 일쑤였다. 관리들이 환곡을 빼돌리거나 착복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심지어 빼돌린 것까지 농민들에게 부담시키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은 개혁하고자 했다.
1872년 환곡제의 폐단을 막기위해 사창제로 바꾸게 된다.
백성에게 농간을 부리는 환곡제도에서 관리를 없애고 농민들에 의해 자체적으로 관리를 하도록 하게끔했다.

영조실록 5년 8월에 이런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당시 참찬관 김시환이 영조에게 아뢴 내용이다.
"조정은 장차 당론때문에 망하고, 소민(백성)들은 장차 군역때문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영조는 군포제를 호포제로 바꾸고자 했으나 면세특권을 누리고 있던 양반들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실행하는데 실패한다.
100년이 지나도 실시하지 못하던 호포제를 대원군은 고종8년 실시하게 된다.
호포제 시행후 양반도 군포를 납부하게 되어 국가재정은 실해졌으며 백성의 부담은 줄게 되었다.

이와같이 흥선대원군의 여러 정책을 보면 그의 개혁적인 성향을 볼 수 있다.
그럼 외교문제는 어떠했을까.

대원군은 일찍부터 프랑스 선교사와 접촉을 시도했었다.
당시(1843) 국제정세를 보면, 홍콩이 영국에 넘어갔고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강제개항(1853년)되었다.
1860년엔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함락시켰다.

대원군도 이미 서구의 세력들이 힘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프랑스함대의 힘을 빌려서 막겠다는 구상을 했다.
대원군과 프랑스선교사의 접촉은 1866년초에 갑자기 끊어진다.
1866년 병인박해가 프랑스선교사를 비롯 천주교 신자를 처형하였다.
이처럼 돌변한 이유는 무엇인가?

안동김씨세력들이 대원군의 그러한 접촉을 정치적 약점으로 삼아 강력하게 박해하지 않는 점을 공격하여 대원군은 불가피한 수단으로 그러했던 것으로 여러 사료에서 나타나고 있다.
초기엔 정치적 이유로 천주교 탄압에 나섰던 대원군이었다.

더 이상 서양세력과는 타협할 수 없는 상황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프랑스군은 병인사옥을 빌미로 강화성을 점령하고 책임과 배상을 요구하였다.
강화의 외규장각에 있던 역대 조선왕실의 막대한 유물과 책들을 약탈해가고 가져가지 못한 것은 불질러 버렸다.

이것으로해서 우리나라는 이전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었고 임진왜란이후 국가적으로 대대로 내려오던 귀중한 유물들 대다수를 잃게 되었다.
2/3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프랑스가 약탈해 간 유물들(직지심경-직지요절심체 등)조차도 루브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반환요구에 이들은 너무나 당당하며 응하지 않고 있다.

프랑스가 강화도를 점령한지 한달만에 조선은 매복공격으로 이들을 물리쳐 프랑스는 물러가게 되는데..
그로부터 2년 뒤인 1864년 미국이 독일상인을 앞세워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외세의 압력을 외세로 막고자 했으나 분노한 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맞서게 되었고 척화비를 세워 그 마음을 다졌다.

당시 훈련대장이었던 신헌(申櫶)이 군사장비를 기록해놓은 훈국신조군기도설(訓局新造軍器圖說)에는 대원군 집권기에 개발한 신무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사진3: 신헌(申櫶) 1810-1888
 자료출처: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inmul/gallery/p2-11.html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화포제작을 하였고, 수뢰포(적함을 폭파하는 수중시한폭탄)등 다른 신무기들도 개발을 하였다.

아무런 대비나 대책없이 그들에 맞선 것이 아니었다. 힘을 기르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국내정국은 대원군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유림의 대표 최익현의 탄핵상소로 대원군의 정치는 끝이 났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대원군의 집권10년은 숨가쁘게 달려왔고 짧지만 큰 변화를 이루었다.
세도정치와 맞서 싸우며 부국강병의 민생개혁을 단행했다.
그 모든 것이 무너져가는 조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나라는 썩어있어 약해질대로 약해져 있었고 타국에 의한 식민지는 예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원군의 외국문물에 대한 개방노력과 부국강병은 외세와 내부의 세력에 대한 외롭고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개화파의 고뇌가 잘 담겨져 있는 근세조선정감에도 흥선대원군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개화하지 않고 쇄국으로만 맞섰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개혁가였으며 적지 않은 부분 개혁을 하였고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결국엔 나라내부의 적에 의해.. 안동김씨의 세도가들에 의해.. 서구문물에 대한 개방은 방해를 받았고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데 그를 쇄국정치가라 함부로 손가락질 할 수 있겠는가?
그로 인해 우리나라의 발전이 늦어졌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조선후기 권력쟁탈에만 관심이 있었던 세도가들의 심각한 당파싸움으로 왕권은 자주 교체되었고 국력은 약해져만 갔던 것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특히 외세로부터 압력을 받았던 시기에도 백성들을 핍박하며 권력쟁탈에만 욕심이 있었던 안동김씨를 대표로 하는 썩어 빠진 세도정치가들이 지탄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대부분의 내용은 KBS HD역사스페셜 제59회(2006년 8월 25일 방송) '흥선대원군은 왜 개혁가인가' 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며, 본인의 생각을 짧게 덧붙인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