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똥철학

인생의 목적(삶의 목적)

금빛오오라 2008. 10. 2. 19:39

인간이 태어나서 누구나 생각해보는 것이 '왜 사는가?' 라는 의문이다. 사람이 아무런 이유 없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를 알게 되면 살아가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은 인간완성을 이루기 위함이다. 최고의 신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숙제를 하는 과정이 바로 인생이다. 인생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 넉넉한 시간도 부족한 시간도 아니다.


최고의 신과 같은 수준이 되라 하니 잡히지 않고 멀리 있는 허무맹랑하고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 있으며 내가 그것을 끄집어내어 찾고 노력해나가야 하는 것인데... 숙제의 주체는 자신이며, 그 어떠한 것도 도움이 되어줄지언정 자신의 완성을 이뤄줄 수는 없다. 이런 언어적 표현도 그것을 그대로 표현할 수 없다. 언어란 자체가 변환된 것이고 이미 원래에서 왜곡된 것이기 때문에 언어로는 다 이해할 수 없다. 내 마음속에서 끄집어 내라고 하면 오히려 더 어렵게 이해하기 쉽다는 뜻이다.


아무튼, 이러한 사상은 동학의 '인내천사상' 에서 잘 보여준다. 사람이 곧 하늘이며, 스스로 노력하면 하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동학의 인내천사상을 모르는 이는 없다. 이러함이 '문자에 구속됨'을 잘 보여주는 것인데, 인내천사상이라는 것이 기억된 상태에서 그대로 각인되어 더 이상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단어 자체를 알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내천사상이란 것을 모르더라도 그 이치를 깨우쳐야 함이 핵심이며 전부이다. 이미 오래전에 우리 선조들은 그러함에 익숙해져 있었다. 적지 않은 자들이 깊이 있는 이해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종교의 경전, 성인의 말씀들은 참으로 좋은 말씀들이다. 이러한 말씀을 수백 수천번 듣고 외우고 있다 해도 별 소용이 없다. 어떤 이는 자신이 성경을 7번 완독했다 하며 내세우던데, 그것을 천번 만번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 깨우치지 않고선 바뀌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에 대한 구체적이고 맹목적인 지식은 위에서 말했던 '문자에 구속됨'에 자신이 스스로 깨우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수행자는 의문이 생길 때 그것들을 찾아야 하며, 영적 지도자라면 그러한 글과 말씀을 주입하려는 것에 대해선 그리 정성을 쏟아선 안 된다.


옛 성인들의 진리의 말씀을 배운다 해서.. 진리의 가르침을 듣는다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불교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소승을 대승으로 만든 부분이 크다. 교과서엔 발전이라 나와 있지만 발전이라기 보단 변질이 더 적당한 단어이다. 종교를 믿는 것만으로... 종교에 몸을 담고 있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이뤄진다고 믿고들 있다. 그러나, 그런 종교일수록 정작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은 그렇지 않고 자신만이 옳다고 한다. 옛 성인들의 말씀이나 영적 지도자의 가르침은 시작점으로만 삼아야 하는 것이지 그것에 의지해서도 갇혀서도 안 된다.


어떠한 것에 대한 모티브도 가져야 한다. 모티브는 견디기 힘든 시련과 아픔과 고뇌에서 나오게 된다. '인간은 왜 사는가?' 라는 것과 같은 의문 말이다. 이런 수많은 의문이 모티브가 되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되고 꾸준히 노력하다보면 그것에 답을 얻게 된다. 자신이 그만한 힘겨움을 경험하지 못했으면 답을 얻기 어렵다. 자신의 노력엔 생각, 참선, 기도 등도 포함된다 할 수 있는데 근원을 찾고 답을 얻는 과정을 거쳐 자신의 수준이 높아지게 되고 진리를 깨우칠 수 있게 된다.


많이 듣고 많이 안다 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초엔 암기식, 주입식 정보가 작게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계속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잠시 해야 하는 것이나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은 이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깊이도 없고 진리를 보는 안목도 없어 이념과 사상의 굴레에 갇혀 진실과 거짓을 구분치 못하고 편을 들어 남을 미워하고 싸우게 되는 것이다. 서양식 교육으로 인한 결과이며, 생각하는 교육, 자연을 알고 인간을 알 수 있는 전통적 동양식 교육이 필요하고 우선되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학문이란 자연(신)의 마음, 인간의 마음을 배우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 이게 시작과 끝이며 기초이자 전부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찾되 종교 철학 이념 사상 등의 모든 틀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러하지 못한 자는 편을 들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일정수준의 진리만 깨우친다 해도 싸움은 잘 발생치 않으며 모두가 상생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큰 맥락만 이해한 채 자신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승으로 삼고 있는 것(사람이든 글이든)이 있다면, 그것을 공경하고 아끼되 진짜 스승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최고의 스승은 자신이며 자신에 의해 열매가 맺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든 그 기반에 의해 자신이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스승으로 생각하는 그 존재는 방향을 잡아주는 존재이지 대신 깨우쳐주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수행에 의해 고귀한 말씀들의 값짐을 알게 될 때 비로소 눈물겹도록 찡한 감동이 오게 된다. 단순히 이해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진리라고 하는 그러한 고귀한 말씀들에 찡하도록 눈물겹도록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면 깨우쳤다 할 수 없다. 하나를 깨우치면 그것은 수많은 것과 통하여 동시다발적으로 깨우쳐지게 된다. 이것중 하나가 바로 진리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란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반복해서 거치게 되면 커진 자신의 그릇에 평범한 인간들이 가질 수 없는 초능력이란 것이 담기게 된다.('초능력을 가지고 싶은가' 참고)


사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인간관법의 안목도 생기게 되며, 종교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안목도 생기게 된다. 진리란 것을 보는 눈이 생긴다는 것이다. 지극히 수준이 높아지면 초능력이라고 하는 신통력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신과 통하였을 때 생기는 능력이다. 고로 신과 같은 수준의 존재가 되지 않고선 가질 수 없는 것이며, 대개의 초능력이라고 하는 것들은 신통력이 아니라 영통력이다. 신통력과 영통력의 수준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무속인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이분들 중 다수가 이만큼의 것을 갖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수행에 의해 스스로 깨우쳐 진실을 꿰뚫어 봐야 하나, 그 몸주가 보여주는 것을 보며 몸주에 대한 믿음과 의지는 자신을 성숙시키는데 방해가 된다. 그러나 자신들은 이러함을 잘 모른다. 그 안에서는 잘 볼 수 없다. 물러나서 훈수를 두는 사람이 정확히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관점이 필요하다.


세상 모든 이가 자신의 수준이 높고 대단한 줄로만 안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만 한다. 자신의 생각에도 항상 의심을 해보고, 의문에 답을 얻었다 해도 반복해서 검증을 해야 함에도 이러한 것에는 그리 정성을 쏟지 않는다. 그것에 정성을 쏟는 자는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반증이다. 이러한 노력이 부족하다면 발전을 가로막는 장벽을 스스로 쌓아놓은 것이니 발전키 어렵다. 깊이 있는 깨우침을 얻으려면 머리도 좋아야 한다. 알량한 머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바른 마음이 우선이다.


부족한 자 일수록 가치 없고 편협함에 더 집중한다. 자신의 수준이 미치지 못한 채 자신의 잘못된 생각에 확신을 가지려 애쓰는 것은 오류를 연발하며 발전할 가능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계속 발전할 줄로만 안다. 먼저 그것에서 벗어나는 노력이 더 중요한데도..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 수준이 아주 쉽게 드러남에도 자신은 종교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최고인줄로만 안다. 종교 안에 있든 그렇지 않든 모두가 과정인 것이며 깨우침에 대한 값진 능력은 최후에 받게 되어 있다. 껍데기를 보는 자는 '누가 말했느냐' '어떤 지위에 있는 자가 말했느냐' 에 중심을 두지만 진실을 보려하는 자는 그것에 무게를 두지 않는다. 위에서 미리 말한 '문자에 구속됨'과 함께 '유명세에 구속됨' 에서 벗어나야 한다. 평가하고자 하는 대상에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는 따라줘야 말이나 인물의 수준을 감히 짐작이나마 할 수 있는 법이다.


어느 것에 구속된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무속인이 영적 성숙을 이루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신이 깨우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서 수준이 지극히 높은 조상은 후손을 무속인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그것을 거쳐 가는 과정으로 삼는 경우는 있다. 또, 인간이 조상이나 혼령들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려 해야 하지 그것을 쫓아선 안 된다.


혼령은 수준이 낮을수록 인간세상에 더 가까이 있으려하며 간섭하고 싶어 한다. 수준이 높은 종교지도자나 조상은 후손에게 일일이 자세한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 환경만 만들어주는데,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기 위함이다. 스스로 깨우치지 않고선 수준 높은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며, 세세한 가르침은 오히려 그것에 방해 됨을 알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우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암기식 정보만 잔뜩 가지게 될 뿐이다. 그 중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자일수록 누구에게 들었던 말을 잘 늘어놓는다. 자신의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도올 선생님과 같이 스스로 학문을 깊이 있게 두루 섭렵해 이것으로 가르치려는 분들은 작게는 다르나 크게는 역시 다르지 않다. 그 대상은 나이 어린 학생들이나 젊은이들로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나이 든 사람에겐 잘 먹히지도 않는다. 제 잘 난 맛에 살아가는 이들인데 말씀이 먹힐리 만무하다. 나이 든 사람에겐 맛보기만.. 또는 의문을 가질 때 방향만 잡아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입식 교육을 받아들여야 할 시기는 지났고 자신이 스스로 깨우치는데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자신이 스스로 깨우쳐야하니 어디에 있든 그리 중요히 생각할 필요는 없다. 좀 더 유리한 조건은 있을지언정 자신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최고의 영적 지도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해도 자신이 스스로 깨우치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면 오만한 자신밖에 남지 않는다. 앵무새와 같은 수행을 반복적으로 한다 해서 자신의 수준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 자신에게 진리가 되어준다. 그러하지 못한 자가... 수준이 되지 않는 자가... 남을 또는. 사물, 사건을 멋대로 단정지어버리는 오류를 자주 범하고들 있다.


그럼 지극히 수준이 높고 고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선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그만한 것을 가지려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꼭 필요한 과정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기 마련이다.

'살아가는 것이 어려워.' '나는 되는 일이 없어.' '사는게 재미 없어' 라고들 하는 것을 자주 본다. 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기회인지 알지 못한다.

 

절망감, 좌절감, 모멸감, 수치심, 무관심, 상심, 고통, 오해, 업신여김, 따돌림, 억울함, 배고픔, 졸음 등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여러 고통들을 많이 경험해 봐야 한다. 이것은 어렵다 해도 나를 만들어주는 보약이지 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과정 없인 수준 높은 인간이 될 수 없다. 위기가 기회이며, 힘겨움에서 성장한다. 그러할 때일수록 자신을 지키는 노력이 더 요구된다.


그런 한계에 도달하려는 의지를 스스로 가지려하는 자는 자기절제력, 인내력, 끈기가 남다른 존재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거친다 해서 모두가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이기적이며 말초적이고 탐욕스러워지는 인간이 대부분이다. 결국 자신을 지키지 못해 패배했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이기적이며 탐욕스러움에 중요성을 두는 자들은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또, 그러한 경험은 깨어나기 위한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니 깨어난 자에겐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깨어나지 못하는 자의 배움은 배움이 아니요. 깨우침도 깨우침이 아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경험은 가치 없는 것이며, 오히려 자신을 더욱 깊은 굴로 빠지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던 것 뿐이다. 그러하니 자신의 생각과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거의 같은 경험을 하지만 마음에 따라 수준이 나눠지게 된다. 어려움을 겪은 후 수준이 높아질 수도 있고 곤두박질 칠 수도 있다.


바른 마음을 가진 자라면 어려움의 과정들이 자신의 수준을 높여주고 그릇을 키워주는 방도가 되어주는 것이라 생각함이 옳고 이로우며, 어려움의 과정들을 자신의 마음으로 원래보다 더 크게 만들 필요는 없다.


남의 평가에 대해서도 초탈해져야 한다. 남이 나를 인정해주든 무시하든 자신은 바뀌지 않아야 한다. 그것에 마음이 동하면 초탈한 것이 아니며 자신의 발전에 방해만 될 뿐, 자신은 지극히 높은 수준의 종점에서 더 멀어지게 된다.


고생, 어려움, 노력, 수준 등을 누가 몰라준다 해도 답답해 할 필요도 없고 알아봐 달라 애달파 할 이유도 없다. 그것에 매달리는 것은 쓸데없는 집착이며 그러하면 자신의 영혼만 피폐해질 뿐이다. 누가 알아준들 내가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 없이는 그런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오래전 수행하신 성인 분들은 이러한 것을 모두 겪으신 분들이다. 그러한 분들에게 잡귀들은 접근조차 꺼려한다. 왜냐하면 수준의 차가 커서 파장이 너무 안 맞기 때문이다. 행실이 바르지 않거나 영적으로 미숙한 자들은 평소에도 빙의가 되지만, 마음수양을 하는 자가 이 과정에서 빙의가 되면 참으로 피폐해지게 되니 주의해야 한다.('빙의와 빙의 예방법' 참고)


툭하면 영적 간섭을 받고 빙의되는 사람은 자신을 뒤돌아 봐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자일수록 바른 말을 잘 듣지 않고 무엇이 바른 것인지 잘 알지 못하며, 자신을 수양하는 데에도 정성을 그리 쏟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수준이 높은 줄로만 아는 이가 많다. 하찮은 영의간섭조차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영을 불러들이는 것은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수시로 가져야 하며 수양하는데 많은 정성을 쏟아야 한다.


일반인도 마찬가지이지만 소위 마음수양을 하는 사람, 종교인들은 더욱더 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영적 능력과 영적 성숙, 수준 높은 깨우침 등은 그런 한계점에 자신이 도전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었을 때 얻어지는 것이란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말초적이고 본능적인 욕구에만 의존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영성이 개발될 수 없고 수준 높은 인간이 될 수 없다. 종교를 믿기 전에 자신에겐 신앙심이 있어야 하며, 신앙심과 함께 깨우침이 우선되어야 한다. 자신이 깨우친 만큼 각 종교의 수준이 훤히 보이게 된다. 종교를 구성하더라도 그런 깨우침을 가진 자들이 종교를 구성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의 종교들은 정치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전파되고 있다.('종교는 권력쟁취를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번성해 왔다.' 참고)


세워질 때는 옳은 종교라 해도 인간들 간의 욕심에 의해 자신의 편협한 사상에 의해 둘 혹은 그 이상으로 나뉘어져 편들어 싸우며 심각히 틀어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서로 나뉘는 것이고 새로운 종파가 생겨나는 것이다. 현재의 기독교를 비롯 수많은 종교들이 각각 수만~수십만개의 종파를 가지게 되었다. 그 안에선 진실을 보기가 더욱 어렵다. 자연법의 기본조차도 모르고, 신과 영을 모르는 종교는 사이비일 뿐이다. 종교라는 것이 단순히 인간을 깨어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임을 잊어선 안되나 모든 종교들이 세뇌시켜 다 그 안에 갇히게 하는 것들 뿐이다.


등 따시고 배부르다면 영적 성숙이란 것은 오지 않는다. 또한, 깊은 사고는 물론 그릇조차 키워지지 않는다. 배부른 종교는 수명을 다한 것이다. 그러하니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물질적인 고통, 수양의 고통, 인간의 고통 등을 두려워하지 말고 피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수준 높은 존재, 진정한 수행자, 진정한 종교인으로 만들어주는 보약이며 필수 과정이기 때문이다. 수행자나 종교인들은 심신의 편안함을 애초부터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어려움의 과정을 이로움으로 연계시켜야 하는 것은 필수 과정이나 모두가 다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이뤄야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이며, 그렇지 못하면 피폐함을 면치 못한다.


진정한 종교에는 등 따시고 배부른 시기는 오지 않는다. 모두에게 인정받아 풍족해진다 해도 나눠주어 자신은 풍족함을 스스로 멀리하니 어찌 배부른 시기가 오겠는가. 그러하니 종교인들은 착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종교인 중에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영적 성숙과 영적 능력 모두를 포기해야 한다. 과유불급이란 말도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종교는 재물과 탐욕을 멀리해야 하며, 풍족해짐을 스스로 경계해야 함에도 유독 그러하지 않는 것이 있다. 종교를 가장하여 인간세상의 저급한 인간을 다 끌어다 모아놓은 쓰레기장이 기독교(천주교는 좀 덜함)이며, 영계의 저급영들을 다 끌어다 놓은 집합소이다. 기독교인들은 수준을 한참 높여야 하나 그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들에겐 맹목적 세뇌와 맹목적 믿음만 있을 뿐이다. 온갖 사회문제에 간섭하며, 권력을 행사하려하고 재물에 탐욕하니 어찌 미천하다 하지 않겠는가. 예수라는 자가 그렇게 가르치더냐. 평범한 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영적 수준의 이들이 기도를 백날 한다해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자신들이 선택받은 자들이라 하는데, 그런 선택받는다고 하는 의식은 일부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기의 문제이지 모든 기독교, 천주교에서 다 갖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러하니.. 성경이란 자체가 수준이 매우 낮다. 수준낮은 서양인들의 관점에 맞춰진 것이다. 자신이 어떤 재앙에 살아남는 선택받은 존재라 믿고 있는 자, 혹은 그것에 의미를 두고 있는 자들은 이미 그러한 자격을 잃었다. 한심하고 보잘 것 없는 그런 존재들을 하늘이 선택할 듯 싶은가. 자신을 지극히 아끼되(자신을 챙기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은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는 마음 이상으로 다수의 생명을 지키려 함이 우선되어야 한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학살을 한 무리가 예수교 무리들이다. 그들에겐 깨우침은 없고 이기심 뿐이다.


절박함이 도저히 일어서기 어려운 지경으로 너무 깊게 오면, 사고, 의식 등이 피폐해지고 극단적 성향을 갖게 될 수도 있으며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쉽지 않다. 이때에 자신을 지키며 일어서는 사람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만 자신의 영적 수준이 높아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어찌 인간이 일면 불쌍하다 하지 않겠는가.


다수에게 그것은 오히려 해가 된다. 일어설 기력마저도 잃어버리게 되거나, 얼굴엔 살기가 가득해지고 자신의 마음이 피해의식, 패배의식, 적대감 등을 만들어내며 사고를 일으키는 경우도 발생케 된다. 범죄자들이 이런 경우라 할 수 있으며, 그 외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 모두가 포함된다.


자신의 한계점에 도달할 정도까지 가는 환경에서 버텨 이겨내면 자신이 겪은 고통의 강도와 고뇌, 깨우침 만큼 수준이 높아지고 그릇 또한 커진다. 이것을 수차례 지속적으로 반복해야만 비로소 높은 수준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수양을 하는 자들이 철야기도, 21일 금식기도, 40일 금식기도와 같은 것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험한 고통과 인내 만큼의 능력을 얻게 되며 이전보다 성숙된 자신으로 서게 된다.


그러하니 지쳐 쓰러져 일어설 힘조차 없는 상태에까지 가야 할 환경이라면, 최소한 자신을 수양하고 수준을 높이는데 참으로 좋은 환경이라 생각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 먹고 살아야 수월해지며 이것은 삶의 지혜이기도 하다. 편하고 배가 부르면 작가들은 글이 나올 수가 없다. 어렵고 배가 고파야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다. 펜을 들 기력조차 잃게 할 정도의 심각한 부족함은 잠시라면 몰라도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으며 글쓰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없다. 가장 좋은 환경은 자신이 버틸 수 있을 만큼의 한계에서 오랫동안 지속하는 것이다. 물론, 깨우친 자는 더이상 그러한 힘겨움을 억지로 찾을 이유가 없다. 깨우친 자가 그러함을 억지로 찾는 건 아직 깨우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선각자들이 위배지로 귀향보내졌다 해서 좌절했던가. 그 상황은 오히려 글쓰기 더 좋은 환경이 만들어 진 것이며, 이때에 역사적 저서들이 많이 나왔다. 이때 아주 깊고 수준 높은 글이 써지게 된다. 글을 쓰는 분이든 다른 어떤 일을 하는 분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한때 공공근로자들에게 도시환경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벽화를 그리도록 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배가 고파야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온다. 절실한 이때에 자신이 갖고 있던 숨은 재능이 나올 수 있으며, 그것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적지 않은 그림이 기괴하고 무서웠으며, 심각히 어두운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시청에서 그것을 지우고 밝은 느낌의 그림으로 바꿨다. 그 공공근로자분들은 자신이 견디기 어려운 심적, 물질적 충격을 오랫동안 겪지 않았겠는가.


그것이 그림에 그대로 표현된 것이다. 정상적일 수가 없다. 그분들은 자신이 감당할 만큼 이상으로 어려운 처지였거나, 환경에 비해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무척 어렵겠지만 그것에서 벗어나 평상심을 유지해야 한다. 이러함에 그들을 안타까워해야 하지 그들조차 버리거나 미워해선 안 된다.


그림이든 글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든, 쉽지 않지만 자신의 그릇에 맞게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한계가 좋은 환경이다. 그런 어렵다고 하는 쓰디 쓴 과정에서 역작이 나오게 되어 있고 자신은 성숙하게 되어 있다. 도를 깨우치고자하는 자에게는 깨달음이, 마음을 닦고자 하는 자에게는 큰 그릇의 마음이, 예술가에게는 가치 있는 예술작품이 나오게 된다.


무엇보다 부족할 때는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하고, 넉넉해지면 스스로 부족해질 수 있는 절제력이 필요하며 어느 상황에서나 자신을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의 고통과 힘겨움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어야 한다. 또, 부족함과 넉넉해짐에 초탈해져야 하는데 그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서로 통한다. 깨우침에 그 둘은 동시에 이뤄진다.


마음수행을 바르게 하면 수호신이 조력하게 되며, 그렇지 못하면 저급한 영에 간섭받거나 빙의되게 되어 있다. 후손을 어떻게 가르쳐야하는지 모르는 조상들이 돈 벌도록 도와준다. 후손을 도와줄 지경도 되지 않는 불편하고 힘없고 부족한 조상은 그것조차도 하지 못한다. 수준 높은 조상은 후손이 많은 돈을 벌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수양하는데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시키기 위함이다. 재물이 늘어남에 그 기쁨의 량만큼 재물을 멀리하며 베품이 필요하다. 자신의 수준이 높아지고 그릇이 커짐에 더 기뻐해야 할 것이다.


자연은 자연을 깨우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힘겨움을,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재물과 편안함을 준다.
많이 가진 자를 부러워하지 말라. 돈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 돈에 빙의되지 말라.
돈을 가까이 하다보면 더 값진 자신을 잃게 된다.
돈이 가까이 올 때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수시로 되돌아봐야 하며 돈을 멀리해야 한다. 돈이 쌓이면 베풀어야 한다.
돈 많고 적음을 인간을 판단하는 잣대로 생각하지 말라. 그럼, 세상이 공평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 닦는 자, 종교인들은 편안함과 재물을 멀리 하는데 더욱더 많은 정성을 쏟아야 한다.

죽기 직전 자신을 되돌아본다 생각해봐라. 돈에 집착했던 것 밖에 없지 않느냐.


인간이 태어난 이유는 인간완성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숙제를 갖고 태어났다. 자연의 이치를 하나하나 깨우쳐가며 수준이 점차 높아지는 것이 흥미롭지 않은가. 고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느냐 미천한 존재가 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있다. 자신을 항상 뒤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물질에 빠져들어 있지 않은지, 육신의 편안함만을 찾고 있지 않은지, 삿된 것에 혹하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인간만이 갖고 태어난 최고의 재능이다.


어려움이 어려움이 아니요. 편함이 편함이 아니다. 이미 이러한 것들을 몸소 깨우친 자는 지극히 수준 높은 존재가 되는 것에 점점 가까이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애초부터 자신이 성인과는 다른 존재라 여길 필요는 없다. 자신이 성인과 같은 마음이면 성인이고, 자신이 신과 같은 마음이면 신이다. 누구에게 인정받고자 함도 필요없고 아무도 몰라줘도 필요없는 것이다. 평범히 살아가는 자도 이러함에 노력을 해야 하며 이것이 삶의 지혜이다.


깨우침은 자신에게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폭발을 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크게 한 번씩 열리게 된다. 오만해짐을 경계하며 지속적인 노력을 하면 결국 수준 높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영적 능력을 성장시키고 그릇을 키우고자 한다면 한계에 이르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데 심각히 두려워해선 이루기 어렵다. 그것이 결코 쉽지는 않겠으나 이러함을 깨닫고 실천하는 자세는 모두에게 요구되며, 노력하여 모두가 지극히 높은 수준의 존재로 바로서기를 바란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이루려고 그러하는 것인지도 알 수 있어야 한다.


현대 물질문명에서 자신을 지키며 수양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나 과거의 인물들보다 더 대단하다고도 할 수 있다. 과거에는 분위기가 마련되어 있었고 다수였다 생각되지만, 현대에선 유혹도 많고 수양할 분위기가 이뤄지지 않음은 물론 손가락질 받기 쉽기 때문이다. 비록 그러한 자들의 수가 적어지긴 했어도 점점 각박해지고 험해지는 이 환경이 오히려 수행하는데 더 좋은 조건임에는 틀림이 없으며 이들에 의해 인간세상은 밝아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