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똥철학

운명과 사주팔자 명리학, 관상학, 성명학의 진실

금빛오오라 2008. 10. 8. 14:53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맞는 말인지 살펴볼까.


운명론자들, 역술가들 등은 재물운이 좋은 사주, 관운이 좋은 사주 등을 좋은 사주라고들 한다. 인생이 편할수록.. 많이 가질수록.. 좋은 사주라고 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도 그 생각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생의 목적인 줄 알고 있으므로..

인생경험을 쌓는 것은 절대적이나 나이 든다 해서 완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은 최초 어느 무지한 역술가에 의해 만들어져 확산되어 모든 이들에게 각인되고 있다. 이것은 수준 낮은 서구의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의 유입으로 황금만능주의, 개인주의 사상이 팽배해져 더 심각하게 되었다.


명리학 등의 운명론은 상당히 정확하다.

운명(運命)이라 하는 것의 운(運)은 돌린다, 돌다 등 주체와 대상으로 동시에 해석이 가능하다.

인간이 대자연의 주기나 사이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정확성이나 가치에 대해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르게 이해해야 함이 우선이다.

자연의 기운(사이클)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지, 꼭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란 것을 인지해야 한다.


인간을 소우주라고도 한다. 이 말은 인간은 우주의 축소판이며 운에 있어서 주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함을 인지하는 것이 우선이며...


무지한 자는 운을 알지 못하며, 현명한 자는 운을 알며, 뛰어난 자는 운과 이치를 알며, 지극히 높은 자는 그것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이 운을 만들어간다. 자연에 역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운을 모르는 자는 비오는 날 짚신을 팔고, 맑은 날 우산을 판다.

운을 아는 자는 비오는 날 우산을 팔고, 맑은 날 짚신을 판다.

뛰어난 자는 비오는 날 짚신을 팔고, 맑은 날 우산을 팔며, 우산을 팔 때 맑아지거나, 짚신을 팔 때 비가와도 동요됨이 없다.

지극히 높은 자는 그것에 구속되지 않는다.


이치를 모르는 자는 인간의 인생이 항상 맑기만을 바라며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다. 사주팔자를 해석하는 이들의 핵심은 운 좋을 때 가지게 되며, 운 나쁠 때 잃게 된다는 것인데 대개 항상 가지려 애쓴다.

우주에는 사이클이 있다. 그 사이클이라는 것은 우주 에너지의 조화에 의한 것이며 그것에 인간은 영향을 받는다.


그 사이클을 알고 살아가는 것은 현명하다 할 수 있는데, 나에게 불리하다고 하는 운, 유리하다고 하는 운이 일정주기로 매번 순환한다. 이것이 윤회이다.


대우의 김우중 회장에게 재물운이 불리해짐을 많은 이들이 알려줬다. 그러나, 그는 고집을 피우며 글로벌경영이라 하여 더 크게 일을 벌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결국 그 대가를 받은 것인데, 무지함과 욕심이 화를 불렀다.

자연에 순행하고자 했다면 억지를 부렸겠는가.


최근 어떤 이가 로또복권 1등 19억원에 당첨된 후 8개월 동안 흥청망청하여 모두 탕진하고 물건 훔치다 들켜 잡혔다는 기사가 떴다.

이러한 자는 횡재수로 잠시 그것을 가졌으나 애초부터 그만한 것을 가질 자격이 되지 못했다.

더 큰 욕심을 부렸으니 원래보다 더 크게 망하게 되어 있다. 어쨌든 이 사람은 잃었지만 남에게 베푼 셈이다.


재물운을 타고난 사주라는 것도 역시 사이클을 탄다. 재물운이 불리한 때에 재물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을 경우 더 크게 망한다. 베풀어야 한다. 베풀라 할 때 가지고만 한다면 탈이 나게 되어 있다. 베풀지 않으면 재물을 크게 잃거나 또 다른 소중한 무엇을 잃거나 건강을 잃거나 몸을 다치게 된다. 재물을 잃는 것 역시 크게 보면 베푸는 것이다.


재물을 챙기는 것에 집중하는 자라해도 재물을 거둬들일 때 거둬들이며, 베풀어야 할 땐 베풀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자연의 섭리는 알아둬야 하지 않겠는가.


재물운이 좋다고 하는 사람은 남의 것을 잘 뺐으며 베푸는데 인색하다는 사람이다. 재물운이 좋다고 하는 관상역시 남의 것을 잘 뺏고 뺏은 것을 잘 가둬두는 형상인데, 원숭이가 남의 입속에 있는 먹이까지 뺏어 자신의 입에 채워 볼이 불룩하게 된 형상을 두고 재물복이 좋다는 귀한 관상이라 하고들 있다.


또, 얼굴에서 코는 세상의 중심이며 자신이라 한다. 콧방울이 발달하고 크면 자신이 중심을 형성하기에 유리하며 자신을 채우는 데에 욕심이 많은 자이다. 이러한 형상을 재물복이 좋은 귀한 상이라 하고들 있다.

과연 그것이 좋은 관상일까?


특히, 정치인들에게 이러한 상이 많다. 유독 한나라당에.

양 볼이 사탕 집어넣은 듯 불룩하며 그것이 축 늘어지기까지 하는 상, 재물복이 좋다는 코뭉뚝이 상, 사기꾼 상, 상대를 해치는 상이 많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건희를 보면 인간미가 잘 보이지 않는다. 꼭 두꺼비 같아 보인다. 할머니들이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점지해 주소서.' 하고 삼신할미께 빌었던 그것이란 말인가.


승부에서도 내가 이길 때가 있고, 상대에게 양보를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대개는 항상 이기려고만 한다. 내가 양보를 해야 함에도 이기고자한다면 더 크게 당하게 된다.


넉넉한 자들이 재물운이 좋지 않다고 하는 때에는 여러 사람들에게 베풀라는 자연의 이치임에도 이런 자일수록 그것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 한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는 법이다. 이 사이클을 윤회라고 한다.

재물운이 좋다고 할 때 많은 욕심을 내고, 그렇지 못할 때도 역시 욕심을 부리거나 그것을 지키려고 애쓴다.


수백년간 넉넉함을 유지했던 가문이 방송에 나온 적도 있다. 이들은 자연의 이치를 알고 남에게 베푸는 것에 아낌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넉넉함을 지키기 위하여 베풀어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넉넉함과 부족함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

둘 다 자신의 그릇을 키우고 수준 높은 존재로 가는 수양의 길이기 때문이다.

넉넉해지면 넘침을 경계하며 나눠줘서 덕을 쌓고, 부족해지면 어려움 속에서 수양하여 덕을 쌓는 법.

깨우치면 그 둘에 모두 초탈해지게 된다. 그 둘은 둘이 아니며 하나이다.

 

'덕(德)'이라고 하면 받는 것이라고들 한다. '인덕이 있다.' '인덕이 없다.' '부모덕이 있다.' '부모덕이 없다.' 고들 하는데..

자연의 이치를 깨우치지 못한 어떤 이가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모두가 잘못 알고 사용하고 있다. 그 모두란 자들의 수준이 그것을 알 정도가 되지 못하니 그대로 믿게 되는 것이다.


'덕을 쌓는다.' '덕을 베푼다.' 와 같이 덕이라는 것은 실천을 강조한다.

덕이라는 것에는 베풂으로써 그 자체가 고귀한 인격체를 형성할 수 있다는 뜻이 포함된다. 꼭 물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덕을 갖춘 이는 줘서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베푸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덕을 갖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어찌 받는 것을 덕이라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가 '인덕이 없다.' '덕 없다.' 라고 당신에게 말한다면 그것에 마음 둘 이유가 없다.

이 글을 보신 분은 더 이상 잘못 이해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무지한 역술가들이 자연법의 이해부족으로 인생에서 재물을 거둬들이는 것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아 버렸다.

인간은 위에서 말한 사이클이라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그 사이클이라는 것은 재물을 거둬들이기에 유리/불리한 시기, 마음수양하기에 유리/불리한 시기, 사고의 깊이를 높이는데 유리/불리한 시기, 변화를 가져야 유리/불리한 시기, 대립하기에 유리/불리한 시기, 준비해야하는 시기/이루어야하는 시기 등이다.


타고난 사주가 가지기에 유리한 재물운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고 재물운이 좋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재물운이 좋다고 하는 사주를 가진 자는 재물을 불리기에 유리하고 마음 닦는데 불리하며, 재물운이 좋지 않은 사주를 가진 자는 재물을 불리기에 불리하고 마음 닦는데 유리하다.

재물운이 좋지 않다고 하는 사주는 자신의 것을 챙기기보단 남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도움은 물질, 정신에 구애받지 않고 범위가 넓다.

가령, 고귀한 존재가 되어 많은 이들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나, 학자로서 가르침을 주는 것이나, 예술행위나 작품으로 감동을 주는 것, 그 외 봉사적인 것 등이다.


인생의 목적은 자신의 수준을 높여 지극히 높은 존재로서 다시 태어나는 숙제를 하는 것이다.('인생의 목적' 참고) 그러하니 어찌 재물이 많은 사주를 좋은 사주라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재물과 거리가 먼 사주가 마음 닦고 영성을 높일 수 있는 사주이다. 고로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목적에 더 부합하는 귀한 사주이다.


많이 가진 자들일수록 욕심이 많고 그것에 대한 집착은 또 다른 집착을 불러 결국 자신의 영혼은 피폐해지게 된다. 집착은 미천한 인간들, 저급한 영혼들이 가지는 필수 아이템이다. 그러하니 어찌 물질을 많이 가진 자를 부러워하랴.

미천한 자는 물질에 집착을 가지며, 인간에 집착을 가지며, 편안함에 집착을 가지며, 배부른 것에 집착을 가지며, 누구로부터 인정받거나 평가받는 것에 집착을 가지며, 자신의 목숨에 집착을 가진다.


최근 연예인들의 자살이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린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이들은 생명을 경시한 것이고 자신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미처 깨우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이가 자신을 욕한다고 해서.. 어렵다해서.. 소중한 자신을 포기해서야 되겠는가. 그것은 자신의 소중함을 모른 것과 함께 누구에게 평가받고자하는 것의 집착이다. 타인에게 평가받고자 함이 없어야 하며, 특히 마음 닦는 이들은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어차피 다수의 미천한 자들의 평가이니 그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또, 인정받는다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은 자신의 사주와 운에 구속되어 지배 받으며 살아간다. 그것은 그런 운이 와서 자신이 그렇게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지 그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때, 자신이 수준을 높여 깨우친 자라면 그러한 운에 절대적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자살한 영가들은 영계에서도 고통은 지속되며 어둠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불쌍하다.

영적으로 미숙한 자들이 자살을 하게 되는데, 영계도 잘 모르고 인간 생명의 소중함도 잘 알지 못하며,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우치지 못한 이들이다.

스스로 의문을 가지며 찾다보면 소중한 진리를 깨우칠 수 있는 법인데 왜 이러한 것엔 정성을 그리 쏟지 않는 것일까.

안타깝고 한심하다.


연예인들은 남에게 인정받고자하는 마음이 크다. 그것이 '인기(人氣)'라 하는 것이며, 그들은 인기를 받는 데에 목말라 하고 있다.

인기를 좋은 것으로만 여기는 심리는 남에게 자신을 인정받고자 함이 강하기 때문이고, 이것은 집착이고 욕심이고 이기심이니 남에게 상처를 주기 쉬운 사람이란 반증이다. 영성이 낮은 자들이 연예인이 되고자 애쓴다. 무지해서 그렇지 게 중 영혼이 맑은 이들은 있다.

또 그들의 행위는 놀이이다. 그래서 그들의 주변에는 저급한 혼령들이 버글대는 것이며 귀신목격담도 끊이질 않는다. 연예인들은 영적 수준이 낮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장래희망 1위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역술가들의 가장 큰 오류가 좋고 나쁨에 대한 구분이다.

인생의 목적을 부와 공명에 두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천한 사주라 하고 있다.

부귀하다하여 부를 귀보다 더 높게 본다. 부를 이루면 귀함도 얻을 수 있다고들 한다.

부를 가지려 애쓰는 자는 수준 높은 귀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자연은 미천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재물을, 수준을 높이고자 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을 갖게끔 했다.


좋은 사주, 나쁜 사주라 남을 함부로 평가해선 안 된다. 그것을 보기 전에 미천한 자신의  수준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가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수준 높고 귀한 자가 되고자 한다면 재물운이 없는 사주를 가졌음에 기뻐하라.


좋은 사주, 나쁜 사주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 어떠한 것을 하기에 유리한 사주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며 최종적으론 그 틀조차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역술가들은 강한 사주, 약한 사주라는 것의 해석도 멋대로 하고 있다. 그것은 그 역술가 자신의 깨우침의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사주팔자에서 내가 생 받음이 지배적이면 강한사주라 하여 긍정적으로 보고, 극 받음이 지배적이면 약한 사주라 하여 부정적으로 본다.

그것은 강약의 구분이 아니라 생극의 구분이다. 생극의 구분을 좋고 나쁜 강약의 구분으로 잘못 이해, 해석하고 있다.


생극이 균형을 이루는 중화된 사주를 좋은 사주라 보고 편안한 생을 살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아니라 중화됨에 가까울수록 모험적이지 못하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성향의 인물이다.

강한 사주를 가진 자를 강한 자라 하며, 약한 사주를 가진 자를 약한 자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둘은 아주 흡사한 성향을 보인다. 둘 다 모험적이며 도전적이다.


정작 강한 것은 재물을 불리기에 불리한 약한 사주라고 하는 사주이다.

이 역시 수준 낮고 물질주의에 물든 어떤 역술가의 제 멋대로 해석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강한 사주라는 것이 재물을 거둬들이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준은 오직 재물이다. 그것을 모두들 답습하고만 있다.


사주 명리학자들은 재물을 모으기 유리하다는 신강사주를 좋게 보고, 재물을 모으기 불리한 신약사주를 나쁘게 보는데, 일단 강약으로 구분하는 그 자체가 이미 사주명리학의 진실이나 자연의 이치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며, 좋고 나쁨으로 보는 건 완전 수준미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신강사주라는 것은 남(할아버지대, 부모대, 친구 동료, 후손들 등)에게 도움을 받는 운의 사주라는 것이고, 신약사주라는 것은 남에게 도움을 받기 어려운 사주라는 것이지 그게 강약의 구분이나 좋고 나쁜 구분이 아니며, 특히 인간의 질적인 면을 말하는 건 더욱 아니다. 인간완성이란 면에선 신약사주가 유리하다. 그러니깐 신강사주에서 인간성이나 수준을 갖추는 자는 나오기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신약사주가 유리하다는 것이다.


신강사주는 부정적으로 말하면 탐욕스러운 사주이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남에게 도움을 받는 사주이고,

신약사주는 부정적으로 말하면 삶이 힘겨운 사주이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스스로 이룰 수 있는 사주이다.

신강사주는 재물을 불리기에 유리한 사주이고, 신약사주는 정신을 높이는 데에 유리한 사주이다.


인간의 질적인 면을 높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신약사주여야 한다. 그러니깐 신강사주에서는 절대 성인급의 수준을 갖춘 자는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사주에 대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 누구나 그에 맞게 유리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려면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시대의 살인마라고 하는 유영철, 어느 역술가는 '그가 운만 좋았어도 한 인물 했을 것이다.' 라고 했다. 그것이 맞든 그렇지 않든 그는 자신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다.

불리한 여건이라 하지만 그것은 불리했다고만 할 수 없다. 자신을 성숙시키기에 좋은 환경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수양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크다. 자신의 수양이상으로 그 어려움이 컸거나, 그것을 이겨낼 만큼의 그릇을 갖추지 못해서 화를 만든 것이다.


범죄자가 되느냐, 수준 높은 인간이 되느냐의 열쇠는 자신이 가지고 있다.

부족함에서 자신의 사고가 깊어지고 수준이 높아지며 그릇이 커진다.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어렵다고 하는 환경이 닥칠 때 비이성적인 심리와 행동을 보이거나 남을 해치거나 자멸하게 된다.


인생의 목적을 알고 마음 닦는 이들에겐 운이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역술가들이 불리하다고 하는 운이든 유리하다고 하는 운이든 그것에 구속받지 않으니 아무 상관이 없다.

항상 자신이 스스로 어려움과 부족함을 만들며, 남들이 어렵고 부족하다고 하는 그러한 때 역시 수양의 깊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이들이 보기엔 평생 부족한 것으로 보겠지만, 실재 그것은 평생 꽉 채워진 것이며 자연에 잘 순응하는 것이며 조화로운 것이다.

그 수준이 지극히 높아지면 자연에 영향을 받는 존재에서 자연과 주고받는 존재가 된다.


사주팔자 명리학 외에 성명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상생을 찾아서 억지로 끼워 맞추는 작업이다. 좋은 이름이 좋은 이름이 아니고, 나쁜 이름이 나쁜 이름이 아니다.

역술가들, 성명학자들이 깨우치지 못한다면 그 기준은 바뀌지 않을 듯 싶다.


관상학도 마찬가지이다. 대개 수준 낮은 미천한 자들이 관상을 보고 있으니 어찌 제대로 볼 수 있으랴.

관상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눈이라 한다. 눈은 마음이 드러나는 곳이다.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먼저 인지해야 하고, 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관상법이 최고의 관상법이다. 사물의 내면 깊숙한 곳까지 볼 수 있는 심안(心眼)이 바로 이것이며, 스스로의 수양으로 깨우치지 않고선 가질 수 없다.

탐욕에 꽉 찬 재물복 좋다는 관상을 좋은 관상이라고들 하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다하지 않겠는가.

명리학자든 관상가든 성명학자든 남을 보기 전에 먼저 자신부터 깨우쳐야 한다.


운이 좋다고 하는 것 나쁘다고 하는 것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며, 좋은 사주라 하는 것 나쁜 사주라고 하는 것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좋고 나쁨의 구분으로 봐서는 안 되며 다른 무엇을 하기에 더 유리하다는 것이며, 마음을 닦는 자들, 수양하는 자들, 종교인들은 특히 그것에 집착하는 무지함은 없어야 한다. 진정 수준 높은 존재가 되고자 한다면 기도하는 데에도 물질적 안정, 자신의 편안함을 갈구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함을 바라는 자는 스스로 '나는 수준 낮은 미천한 존재로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역술가들은 단순지식에 가로막혀 수준 높은 존재로 발전하기 어렵다. 사주를 보는 것이 무슨 자연법이나 자연의 이치를 깨우친 마냥 생각하고들 있다.

무속인들이 몸주를 가짐으로서 영적으로 구속되어 발전할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때론 지식이 자신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일 수 있음에 의구심을 가져야 하며, 수시로 자신의 지식과 믿음을 확인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큰 것을 깨치는 데에 잠시 거쳐 가는 과정으로 삼는 경우는 나쁘지 않겠으나 이러한 자는 매우 드물다. 그것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점점 구속되기 때문이다.


넉넉한 살림을 동경하는 자에게 깨우침은 오지 않으며 수준 높은 영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수준이 높고 닦인 조상은 후손이 부자 되는 것을 반기지 않고 도움이 없으며, 고귀한 인간은 부자 됨을 스스로 멀리한다.

재물을 탐하는 사주, 재물복이 있는 사주를 부러워 말라.

미천한 자들이 수준 낮은 자신의 안목에 의해 '부족하다' '좋지 않다' 라고 평하는 사주가 더 가치 있는 사주임을 인지할 수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관상학, 성명학 모두 마찬가지.

그러하니 어찌 세상이 불공평하다 하겠는가.


사주의 운을 활용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지혜롭다 할 수 있다.

그것보다 더 지혜로운 것은 사주가 어떻든 운이 어떻든 진리를 깨우치려 노력하는 수양의 자세이며 자신을 지키고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고귀한 존재가 되고 싶다면 사주, 운 등에 구속되지 않아야 한다. 어떠하든 모든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자연의 이치를 알고 진리를 깨우쳐 가며 자신의 수준을 높임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불리함을 만들어 갈 줄도 알아야 한다.


성철스님에게 대기업회장 등의 돈 많고 유명하다고 하는 인물들이 많이 찾아왔다. 시주도 많이 했겠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성철스님이 넉넉하고 편안함을 찾았는가. 이미 그는 그 이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에 안주했다면 수준 높은 존재가 되지 못했다.

찾아오는 이들은 돈으로 마음을 사려했으나 성철스님은 차가웠다.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3천배를 하지 않고선 그를 만날 수조차 없었다.

 

돈으로 신의 마음까지 살 수 있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을 당장 갖다 버려라. 돈을 주면 신이 잘 봐주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다. 미천한 인간이 한 말을 신이 한 말이라 감히 신을 더럽히지 마라. 신 앞에 자신이 부끄럽지 않은가. 이러한 자들이 어찌 마음 닦는다 할 수 있으랴. 어찌 남을 교화시킬 수 있으랴.

종교 안에 있다하여 깨우친 것이더냐. 종교 안에 있는 것만으로 수준이 높아진다더냐.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러함은 수양하는 자들,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깨우쳐 살아가야 한다.


사주팔자 명리학, 관상학, 성명학이 어떠한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감이 오는가.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미천한 자들이 어설픈 기준으로 사주와 운명에 대해 논하는 것을 그대로 다 믿지 말아야 하고, 그것에 얽매여 자신을 잃는 무지함은 더욱 없어야 한다. 이러해도 좋고 저러해도 좋은 법이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며 그것에 집착하게 되어 자신을 볼 수 없게 되고 깨우치기도 어려우며 수준 높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재물욕이 가장 크나 그것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넓게 보면 식욕, 수면욕, 성욕, 소유욕, 명예욕, 권력욕, 승부욕 등 모두가 포함된다.

 

'제 밥그릇은 갖고 태어난다' 라는 속담이 있다. 어떤 이는 부모의 무책임함을 원망하는데, 물질문명에 찌든 시각으로 이 뜻을 이해할 수 있으려나. 소중한 생명으로 태어난 이유가 다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재물과 편안함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부족하다 할 때 자신의 욕심이 만든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주만물 중 가치가 없는 것이 없다.

흘러가는 운, 세월이라는 것도 어느 한때 가치가 없는 것이 없다.

감히 어떤 이가 우주와 우주의 운의 흐름에 가치가 있고 없음을 논할 수 있으랴.

인간을 '소우주'라 하여 우주의 축소판이라 하지 않았던가. 모두 소중한 흐름이다.

우주든 나 자신이든, 우주 전체의 운의 흐름이든 나 자신의 운의 흐름이든 그 모두가 가치 있는 것이며, 그것은 좋고 나쁨으로 구분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평생 부족함과 힘겨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깨달으면 운의 영향이 어떠하든 자신은 흔들림이 없고 노력하여 비로소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아무나 알 수 없는 인생의 숙제를 풀었다면 실천하는 것만 남았다.

 

부족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이들, 모자란다고 따돌림 당하는 이들, 어리석다고 무시당하는 이들일수록 수준 높은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면 놀라겠는가?

세상은 불공평하지 않으며 찾고자 노력하는 이는 진정 귀중한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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