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똥철학

신과 인간은 각각 독립적이며 동등한 자격체이다.

금빛오오라 2009. 4. 23. 01:37

신이라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며 그것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가.

누구는 신이 없다하고 다수는 맹목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왜 그런 것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어떻게 닦아가야 하나.



신과 인간의 거리


최고신을 비롯하여 신이라 하면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뭔가 특별한 존재라 생각되지 않는가.

신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접할 순 있지만 과장되고 부풀려져 인간이 느끼는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만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또, 최근 영국에서는 신이 없다하여 많은 교회가 문을 닫고 무신론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신의 존재에 대해 절대적 믿음을 가졌던 이들이 왜 180도 바뀌어 무신론자가 되고 있는 것일까.


신을 부풀리기도 했다가 없다하기도 하는 것은 인간에 의해서이지 신이 스스로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럼 인간이 신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는 가능성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는가.


대개 종교에서 신에 대한 내용을 접할 수 있다.

지도자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백성의 마음을 사는 것이다. 특히 정당치 못한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이는 자신의 입김을 강화하고 전체를 하나로 묶는 것이 더욱 절실했으니 종교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 여겼다.

우리나라 역시 시대가 바뀔 때 등 권력가들은 종교를 도구로 사용해 왔는데, 종교를 장려하거나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꿔 버리기도 했다.


종교나 신을 향한 마음을 이용해 먹기에 안성맞춤이라 여겼으며, 일부 종교(크리스트교)는 스스로 정치권력과 손을 잡기도 했다.

종교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키고 신이라 하는 존재를 절대적인 존재로 만들수록 권력가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기 수월했으며 그 종교 또한 번성할 수 있었다.

권력가를 신의 명을 받은 자로 꾸며내거나 신과 동일시하기까지 하여 충성심을 애써 강요하기도 했다.


덕분에 신이라 하는 존재에 대한 경외감은 커져만 왔고 맹목적이고 극단적인 믿음까지 더해져 전지전능한 존재로까지 인식하게끔 되어 감히 근접할 수 없을 정도의 존재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그럼 신이 없다하는 무신론자가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언서나 예언가, 그리고 모든 종교의 경전들은 지구에 큰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들 하며, 과학자들도 머지않아 지구에 재앙이 있을 것이라는 발표를 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빙하가 20~30년 정도 후 전부 녹아 지구에 기상이변이 속출할 것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상식이 되어 버렸다.


판구조론은 지구의 껍데기는 10여개의 큰 판과 몇 개의 작은 판으로 이루어져 있고 맨틀 위에 판이 떠있는 상태로 이동한다는 것인데, 이동시 충돌을 일으켜 이 충격으로 경계지점의 일부 대륙이 잠김과 동시에 지진이 일어나고, 지구 곳곳에 이미 누적되어 밀도가 높아진 마그마가 분출하게 되니 화산이 폭발하고, 지구 전체가 화산재로 뒤덮여 해를 가리니 식물은 죽고 오랫동안 식량이 나지 않아 인간마저 위태롭게 되며, 해안에서의 지진은 거대한 쓰나미를 불러온다. 하는 말은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럼, 신이 있다면 이런 기상이변을 신이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일까? 지구를 한번 뒤집어엎는 것이 우주만물을 관장한다는 최고신의 계획이며 작품일까?

신이 전지전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것조차 신의 뜻이라 하거나 자신만은 살아남을 것이라 할 것이며, 신이 없다하는 이들은 재수 없다 하지 않겠는가.


신은 인간과 자연에 간섭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주만물이 생성 변화 성장 유지하는 비법이며, 최고의 신 역시 자연법에 적용받는 존재이다.

최고신도 자연의 한 부분이지 그 존재만 자연의 전체가 아니다. 나도 자연의 부분이나 나의 모든 것이 그것에 구속받지 않는다.

지구에 큰 재앙이 온다해도 최고신 역시 재앙을 맞는 자이지 그의 의지로 재앙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재앙이라 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일 뿐 어떠한 존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크게 보면 재앙이 아니라 변화의 시작이다.

최고신과 그 외 신들의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며, 모든 것이 그들의 계획이나 의지로 이뤄지는 현상이 아니다.


신이 자연과 인간에 간섭함이 없으니 무지한 이들이 '신이 없다' 라 여기게도 된 것이다.

신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갖고 있는 이들과 신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자신이 신과 같은 마음을 가지려 애쓰다보면 진실을 자연적으로 알게 되는데 자신은 정작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준 셈이라 볼 수 있다.


고대 건축물 대부분에는 신을 향한 마음이 담겨져 있으며, 그 정성과 규모는 현대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한때 다수의 인간들이 신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으나 인간들의 탐욕과 어리석음, 무지함으로 신과의 거리는 멀어져 신에 대한 갈구함은 오히려 커지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고대건축물의 규모와 신비함이 클수록 신과의 거리가 멀어졌다는 반증이다. 고대건축물은 신과 인간의 간극에 비례하여 애를 쓴 흔적이었던 것이다.

그 고대인 자신들은 건축물, 의식, 그 외 신을 향한 마음 등으로 신과 가깝게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신이 인간과 거리를 두게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지하고 스스로 탐욕함을 쫓아 신을 멀리하게 된 것이다.



신과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바른 이해


신과 인간에 대한 이해부족이 여러 문제로 파생되어 현재는 혼란스러움이 심각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신을 알면 인간을 알 수 있고, 인간을 알면 신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같은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자신을 알면 신을 알 수 있다.


이제는 무지하고 탐욕스런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낸 거품을 없앨 때가 되지 않았는가.


1. 우주는 자연적으로 돌아간다.

최고신이라 하는 존재는 자연의 마음이다.

내 육체에 나의 마음이 있는 것처럼 그 또한 자연을 체로 하며 마음을 갖고 있다.


그 역시 인간과 같이 변화 성장하는 존재이며 대자연의 조화를 어찌할 수 없다. 자연이라는 것은 인위적이지 않고 억지적이지 않고 말 그대로 자연적으로 움직여지는 것이다.


내가 음식을 먹으면 식도를 거쳐 위를 거쳐 장기관에서 소화액이 나와 분해하고 소장 대장을 통해 흡수된다.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그 작용은 자연적으로 이뤄진다.

최고신 역시 대자연을 체로 두지만 자연의 조화와 변화는 그가 의도함이 아니며 자연적인 것이다.


최고신의 권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는데, 우주를 포함 자연이 생성되고 성장하며 소멸하는 것이 그의 의지가 아니니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다.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각 장기들이 자연적으로 소화를 시켜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내 몸에서 최고의 신은 나 자신이다. 내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으며 위장에서 위산이 분비가 되는지 소장에서 흡수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최고신도 마찬가지이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 모두를 자각하지 못한다.


음식을 먹고 배출시키는 것은 나의 마음이 작용한 것이기도 한데 이것은 인간의 육을 갖고 있기에 그런 것이며, 경지에 도달할수록 생리작용은 최소화 된다.


2. 관여하지 않으며 최고신 또한 자연계에서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하다.

자연(自然)이라는 단어는 '스스로 그러하다' 란 뜻이다.

자연은 인위적이지 않고 억지적이지 않으며, 말 그대로 자연적이라는 것이다.

자연은 자연적으로 생성, 성장, 분해, 소멸한다.

인간의 생로병사 역시 어떤 존재가 의도하거나 간섭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자연적으로 그리되는 현상일 뿐이다.


기독교에서는 최고의 신이 만물을 창조하였다고들 한다. 말 한마디 글 하나하나에도 그 수준이 잘 드러난다.

아주 작은 생명체까지도 그 오묘함은 참으로 놀랍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작품이 아니다. 조물주라는 말은 인간의 무지함이 만들어낸 말이다.


최고신이 만들고 싶다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없애고 싶다하여 없애버리는 것도 아니다.

학계에선 지구상에서 생물이 하루 평균 50-100여종 멸종한다하지만('국립중앙과학관, 사라져 가는 동물들 특별전' 기사 참고) 개체가 멸종하는 것은 그의 뜻이나 의지가 아니며, 안타깝다하여 억지로 멸종을 막지 않고, 부족하다하여 억지로 다시 혹은 새로 만들지 않는다.

그는 조물주가 아닌 것이다.


그 역시 하나의 생명체이며 누구보다 생명체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고 누구보다 자연법의 이치를 잘 알고 있는 존재이다.


내가 태어 난 것을 나 스스로 의도하지 않았다. 또, 내가 태어나기 위해 무엇이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최고신 또한 그의 의지대로 태어난 것이 아니며 무엇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태어나고 보니 자신이 있음을 알게 되는 인간과 같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주는 만들어졌고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는 태어났고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주는 생성 유지 변화하고 있다.


최고신이 인간에게 그의 마음을 심었다 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가 자신의 마음을 갖고 있듯이 자연의 조화로 나도 나 자신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뿐이다.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신과 같은 마음을 자연적으로 갖고 태어난 것이다.

신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무슨 이유로 다른 생명체에까지 제 마음을 심겠는가.

다른 생명체조차도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수준 낮은 이기심을 가진 존재라 생각하는가.


최고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들었다 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의 체는 자연 그 자체이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간혹 UFO에 관련된 내용을 접하게 되는데,

UFO라는 것은 그들이 영적 수준만큼 물질문명도 발달시킨 결과물이다.

탐욕하며 제 배만 채우는데 평생 시간을 허비하는 인간의 물질주의 시각으론 그들을 이해할 수 없으며 UFO라는 것을 가질 만큼 문명을 발달시킬 수도 없다.

물질문명은 바른 영적 기반 없이는 스스로에 의해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으며 번성과 몰락을 반복한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한다 생각하는 것, 그들이 뺏어가고자 한다 생각하는 것은 탐욕하고 무지한 자들의 생각일 뿐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또는 자연이나 신에게 간섭함이 없다.

그들이 지구를 구경만하고 사라지는 것은 자연법을 잘 알고 있는 수준 높은 영적 존재임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 그대로 믿고 있는 이들이 많다.

인간 개인의 욕심으로 어떠한 의도에서 부풀려지거나 무지하여 지어내 꾸며댔으나 대개 그것을 알 만큼 스스로 깨닫지 못해 진실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믿곤 하는 것이다.



인간과 신은 각각 독립적이며 동등한 자격체이다.


인간은 신과 같다. 신은 인간과 같다.

인간은 신을, 신은 인간에게 간섭함이 없다.


최고신은 인간의 마음을 볼 수 있으니 답답해할지언정, 인간의 마음까지 움직일 순 없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인간 고유의 마음 性(心 + 生)을 각자 가지고 태어난 독립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홀로 생각하고 독립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한 신비함을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봤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동물들의 집단 자살은 최악의 상황에서 종족유지를 위해 개체수를 조절해야만 할 때 공동영으로 이뤄진다.


최고신이 인간계에 관계해야 할 때가 있다해도 인간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끔 애쓰는 선이지 직접적으로 인간을 어찌하지 못한다.


최고의 신이라 해도 인간에 간섭하지 않는데 감히 다른 그 어떤 신이 인간에게 간섭할 수 있으랴?

최고의 신이든 그 외 신이든 입장은 같다.


신이 간섭하거나 인간의 마음을 좌지우지한다면 인간세상은 이렇게 혼란스러워지지 않는 법이다.

인간에게 간섭하거나 보이지 않는 도움을 주거나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존재는 신이 아니고 인간의 혼령이다. 대개 그것을 신으로 알고 있어 문제가 일어난 부분이 적지 않다.


신은 자연을 체로 하고 있고, 인간은 사람의 형상을 체로 하고 있을 뿐, 원래 그 마음은 다르지 않다.

단, 신은 인간의 육체를 부러워는 하나 집착이 없으며, 인간은 신을 경외하며 신통함을 갖고 싶어 한다.

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자, 신통함을 갖고 싶어 하는 자라면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신과 같은 마음을 가지면 된다.


신과 인간은 서로 마음의 통함이 있을지언정 서로를 구속함이 없다.

신이든 인간이든 각각의 독립체이며 그 개체들은 수양하여 지극히 높은 존재가 되면 최고신의 마음도 스스로 가질 수 있게 된다.

정확히 구분하면 신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기 보단 수양하다보면 지극히 고귀한 마음을 가지는 되는데 그것이 신의 마음 혹은 최고신의 마음이며, 신은 수양하여 이미 그러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하니 억지로 신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신을 향한 마음을 가질지언정 신이 목표가 될 순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수양의 정도에 따라 나눠지는데 신도 마찬가지로 수양의 정도에 따라 수준이 구분되어지나 인간보다 한 수 위라 할 수 있다.

단, 인간은 육체를 갖고 있어 온갖 고통에 시달리니 매우 짧은 기간에도 지극히 높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안타깝지만 그러함에 노력하는 이 매우 극소수이고, 대개는 죽어서 살아생전보다 더 큰 고통과 힘겨움을 오랜 세월동안 보내게 된다.

인간은 육체를 갖고 있어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기 쉽고, 보이지 않는 것의 감각이 각성되기란 쉽지 않다.


무지한 자, 미천한 자일수록 보이는 것에 중요성을 더 많이 두며 스스로의 수양에는 게을리 한다.

돈에 눈이 멀었으면서도 자신은 바르고 열심히 사는 줄로만 알고들 있다. 그것이 탐욕과 무지라는 것이다. 돈 자체를 나쁘다 좋다 할 순 없다.


인간은 신과 같은 자격체이나 모두가 고귀한 존재, 혹은 모두가 신과 같다 할 순 없다.

인간을 신과 동등한 자격체라 하니 무지한 이들이 자신을 신이라 우길까 걱정된다. 또는 오만해지지 않겠는가.

오만함에선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다. 그 마음에 더 이상의 것이 들어갈 틈이 없어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거나 비뚤어지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함께 수양하던 동료가 '나는 최고신이다.' 라 크게 외쳐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것이 반복되어 결국 쫓겨났는데..

그 누가 자신을 알아봐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족과 빙의증상이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자신이 신이다' 라 한다해서 신이 될 리 만무하다. 그 자신이 그만한 수준과 그릇 밖에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준 셈이다.


인간과 신은 그만한 인격체와 수준을 갖춘 존재가 되면 파장이 일치하여 마음이 통할 뿐, 높고 낮음을 가리려 하지 않으며 내세움이 없다.

인간으로서 고귀한 수준이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 맡겨진 숙제이며 이것은 삶의 목적과 일치한다.('삶의 목적' 참고)


신과 같은 존재라 하면 신과 파장이 일치하는 동일한 수준의 자이다. 이러한 자는 신계에서도 신의 대접을 받으며 그의 능력은 신과 같으며 애써 인간사에 관여하려 들지 않는다.

인간사에 간섭하려들거나 빙의 등 인간과 가까이 하려들수록 수준이 낮고 부족한 혼령이라 할 수 있다. 영능력을 보여주는 이들은 대개 빙의령에 의한 것인데 그러한 것들의 다수를 포함한다.

신과 파장이 일치하는 수준의 자는 생명체의 소중함을 알며 미천한 인간과 저급한 영들의 필수 아이템인 한, 미련, 집착을 모두 버렸고 무엇에게 인정받고자 함까지 초월했기에 인간사에 관여하려 들지 않는다.


자신을 최고신이라 여기며 최고신의 입장과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있어야 하나 무지하고 편협한 이들이 오만해질까 두렵다.


오래전 어디서 봤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름 도력이 높다고 하는 자가 세상이 혼란스러우니 자신이 죽어 신께 따지러 가겠다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자는 마음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했어야 했다. 물론, 다시 한다해서 자신의 수준을 더 높이거나 깨우쳐 진실을 알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는 제 생명의 소중함을 잘 알지 못했고, 죽으면 신과 대면할 수 있다고 하는 영적 무지함, 그리고 신이 인간사에 관여한다는 잘못된 믿음, 신이면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는 존재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미처 깨우치지 못하고 죽은 영혼은 다른 영혼의 소중함도 잘 알지 못하며 함부로 대한다.


죽어 혼령만 남게 되면 자신이 닦은 만큼 영적으로 각성될지언정 능력이 커지거나 신과 대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준과 능력도 죽음과 동시에 정지되다시피 한다.



천당과 지옥


신이 인간의 살아생전의 삶에 대해 심판을 한다고들 한다.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천당에 가고, 나쁜 짓을 많이 하면 지옥에 간다고 믿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임사체험을 한 자들 역시 인간은 심판을 받는다고들 한다. 그들이 경험한 것은 꿈과 비슷한 것일 뿐이지 실제가 아니다.


나 어릴 적 착한 일 많이 하면 크리스마스 때 산타가 와서 선물을 준다고 믿었었다.

그러한 믿음을 나이가 들어 성장하였을 때까지 가져가는 것은 크게는 나쁠 것 없지만 성장한 후 사실이 아님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영적 성장을 하게 되면 신이 인간을 심판하지 않으며 천당과 지옥이 없음을 스스로 잘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불교에서의 천당과 지옥, 환생이라는 것은 권선징악차원에서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부처님이 그것을 깨우치지 못했을 리 없다.

크리스트교에서의 천당과 지옥은 최초엔 없었으나 조로아스터교의 천국지옥론을 그대로 베껴와 자신의 것처럼 해버렸다.

그 외 수많은 것들을 이곳저곳에서 짜깁기해서 가져와 억지로 만든 것이 크리스트교이다.


천주교 기독교는 큰 변화를 가져야만 한다.

그들 모두를 한심한 이라 생각진 않는다. 그중엔 반드시 스스로 연막을 해치고 진실을 볼 수 있는 자도 나올 수 있기 마련이다.


내가 나의 몸체를 갖고 독립체로서 나 스스로 닦아가는 존재이니 그 어떤 존재도 나를 심판할 수 없다.

최고신이라 해도 인간을 심판할 수 없으며 그러함이 없다.


천당과 지옥은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고귀함과 천함이라는 것 역시 자신 스스로의 깨우침과 닦임에 의해 자연적으로 정해지게 되는 것이지 누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제 마음이 미련과 집착, 탐욕으로 똘똘 뭉쳐져 있을수록 한과 고통은 커지며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해할만한 수준의 것(어려서 영적으로 미처 성숙하기 전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선대조상의 업이나 운적인 요소로 화를 입은 것)도 있으나 대개 죽어 혼령이 되어서도 그것을 버리지 못하여 스스로 고통스러우며 그것이 힘겨우니 인간에게 다양한 경로로 접근하려고 한다. 비로소 이때 인간의 육체에 대해 아주 조금은 중요성을 인지하게 되나 집착을 버리지 못해 또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함에서이지 인간의 육체에 대한 소중함까지 잘 알아서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이며 대개는 그러한 영들까지 신이라 여기고들 있다.

수양으로 미련 집착을 버릴수록 고통과 한은 사라지며 평안함을 가질 수 있게 되는데 그 마음이 천당이라면 천당인 것이다.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자가 미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해 깨우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면, 이 영가는 죽어서도 그 믿음이 바뀌지 않으며, 후손이나 살아있는 자에게 자신의 믿음을 꿈 등으로 보여주려 애쓰며 가르치려 한다. 특히 그런 영가에 빙의된 자는 그렇게 믿기 더욱 쉽다.


개고기나 닭고기를 먹으면 산신이 노한다느니 부정을 탄다느니 하는 것도 살아생전에 환생이 없음을 미처 깨우치지 못한 혼령이 산 자에게 괘씸하다 하여 혼을 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 산신이라 하는 존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혼령이다.


살아생전 어떤 종교에 맹목적 믿음을 가진 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죽었다면 죽어서도 후손 등에게 자신이 믿었던 종교를 강요하며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후손의 결혼을 방해하기도 한다.


전두환이가 백성을 속여 탐욕을 챙겼으며 수많은 이를 학살했으니 천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만 신은 그의 만행에 간섭함이 없고 심판하지도 않는다.

단, 인과응보는 반드시 자연적으로 따르며 당대와 후대에까지 지속적으로 찾아온다. 그러한 자연적 인과응보 외에도 수많은 인간과 혼령이 그에 따른 간섭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함에도 신은 개입하지 않는다.



인간의 혼령과 신을 구분하라.


인간을 애써 신과 구분하여 다른 존재라 여길 필요는 없으나, 모두가 그만한 수준의 존재는 아니며, 인간의 혼령을 툭하면 신이라 여기는 것은 옳지 않으니 알고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후손 등에게 신병이나 주고 자칭 신이라 하는 존재는 대개 수준이 높다할 수 없는 빙의령들이다.

그런 영을 몸주로 모시다 죽고 나면 이젠 자신이 신이라 하며 인간의 몸을 찾아다녀 또 그 짓을 하고 다닌다.

인간들을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다. 물론, 후손조차 그러한 마음이라면 누가 상관할 바가 아니며 개중엔 그리 나쁘게만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신과 같은 수준이라면 인간의 육체에 대한 미련이 없고 인간에게 간섭하려들지 않는다.

인간에게 신, 수호신이라 하며 으스대며 다가오는 수준미달의 영혼들에게 속아 넘어가 소중한 자신을 함부로 내주지 않아야 한다.


그들의 재주를 무슨 큰 능력인 마냥 신비롭게 생각하는 자들이 많은데, 보이지 않는 세계를 무시하는 것이나 그것에 신비로움을 가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고 둘 다 위험하다. 자신이 무지하여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에게 딱 그만한 수준의 영들이 접근하여 훼방을 놓거나 제 하고자 하는 대로 유도하려 한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영을 몸주로 갖고 계시는 분들은 지극히 높은 존재로 발전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대개 아주 작고 사소한 것까지 몸주나 영가의 영향으로 보고자함이 앞서니 마음을 닦아가는 주체이자 핵심인 자신의 비중은 높지 않으며, 스스로 그 존재에 종속되고자 함이 크다.

'신' '몸주'라는 단어 자체에서부터 그러한 의식이 담겨져 있는데, 신에 대해 알지 못하고 나 외의 다른 영은 내 몸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을 잘 알지 못함에서이다.


내 몸의 주인은 오직 나이며, 이것을 잘 알지 못하거나 자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영이 간섭하기 쉬워지며, 빙의 또한 잘 되며 그런 존재에 휘둘리기 쉽다.

빙의에 걸려 영의 간섭을 받고 있는 이들은 빙의령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둘러보고 자신을 찾고자 노력해야 한다. 제 스스로 부른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의 닦임의 그릇이 커 그 영들을 담을 수 있다면 그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 그 주인이 바로 나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크게 보면 빙의라 볼 수 있지만 성격은 다르다.

'나' 라는 것에 소중함을 인식하고 나의 주인은 나이며 영적 성숙의 주체도 자신이라는 것을 반드시 인지해야만 한다.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이에게는 영들이 간섭하려 해도 혹은 심지어 잡령들을 몸에 집어 넣는다해도 나 자신이 일방적으로 그것을 따라가지 않게 되고, 그들에게 좌지우지되어 자아를 잃거나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으며, 잡령들은 힘을 쓰지 못한다.

이만한 것을 알고 실천하는 자에게는 이미 파장이 맞지 않아 잡령들은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그 주위의 기운까지 맑다.


혼령은 기본적으로 영안과 특유의 재주를 가지고 있으며 닦임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난다.

다른 영들의 힘을 빌려 영안과 재주를 가질 때부터 자신의 영성과 수준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우나 극히 일부는 그것에도 구속받지 않는다.


정신 수양을 하는 이들이 '나는 왜 영능력이 생기지 않을까.' '언제 생길까.' 라는 것에 의문을 가지겠지만, 바르게 수양을 했다면 자신도 잘 느끼지 못하는 능력을 반드시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들이 기본적으로 가지는 것보다 더 소중하고 귀하며 그런 수행의 길이 인간으로서 바른 수행의 길이다.

그러니, 더디다 여길 이유가 없으며 영들의 힘을 빌려 영안을 가진다거나 기막히게 정확한 예측을 한다거나 하는 것 등을 신기해하거나 부러워 할 필요 없다.

나의 닦임의 정도에 따라 언젠가 그보다 더 큰 것을 자연적으로 가지게 되며, 그러한 능력을 가진다하더라도 수행의 길이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에 대한 신비감이 클수록 능력을 가장한 영들의 접근을 부르며, 자신을 특별한 능력자, 신의 선택을 받은 자, 신의 보호를 받는 자 등으로 착각하게도 되며 수행에 큰 걸림돌이 되어 발전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른 영혼을 몸주로 모시거나 다른 영이 나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 나의 영성은 발전할 틈이 좁아진다.

그러니, 그런 재주를 부러워 말며 자신 스스로를 닦아 가는데 집중해야 한다. 이것이 순리이며 바른 수행의 길이다.



인간은 매우 빨리 영적 성숙 할 수 있다.


인간이 태어난 것은 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과정의 시작이며, 인간은 육체를 갖고 있어 매우 짧은 시기에 지극히 높은 존재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


자연은 수천 수만 년이 지나도 그리 많이 변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그리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성장이 느리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의 마음을 포함한 선도 악도 아닌 성(性)을 갖고 태어나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고 자연체에 비해 매우 빨리 변해가며 늙어 간다.

변화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빠른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연은 이러하지 못하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 한 수천 수만 년이 지나도 그리 많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의 세계에서 신들이 수천 수만 년 동안 닦을 것을 인간은 몇 십 년 혹은 몇 년 만에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수명을 다하여 죽게 되면 육체가 없으니 그것으로 수준은 정지되거나 지체된다. 그러하니 나의 육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인간은 나의 육신 덕분에 힘겨움과 고통을 경험하며 깨우침을 가질 수 있고 고귀한 존재가 될 수도 있고 지극히 아름다운 마음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시간이 짧은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긴 것도 아니다. 그만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데에는 딱 맞는 시간인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에 마음 아파할 이유가 없다.

바르게 살아가는 이, 바른 수행을 하는 이는 최소한 그 이상의 것을 가지지 않는가.


나이 들어 늙어 가는데 그만한 가치를 얻는 것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며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나이 들어 늙어가는 변화만큼의 것을 스스로 가지지 못하는 자는 늘어나는 자신의 주름을 보고 안타까워해야 할 것이다.


원석을 깎아야 가치 있는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으며 깎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지극히 높은 수준이 되느냐, 보잘 것 없는 미천한 존재가 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있다.



신을 찾고자 하는 잘못된 생각과 방법, 마음 닦는 이는 고집을 잘 활용하라.


툭하면 신의 뜻이라 여기는 이들...

신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이들...

신이라 하는 것에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이들...

신이 계획한대로 이뤄지고 있다 믿고 있는 이들...

신이 자신을 돌봐준다고 생각하는 이들...

신을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기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이들...


이들은 자신이 독립적 존재로 신과 같은 자격체로 태어났음을 바르게 인지해야 함이 최우선이다.


열심히 기도하면 되는 줄 알고, 열심히 절하면 되는 줄 알고, 열심히 경전을 외우면 되는 줄 알고, 열심히 찬송하면 되는 줄 알고, 절대적 믿음만 있으면 되는 줄 안다.

그 이전에 바른 마음이 우선이며, 이것을 갖추지 않고선 제 아무리 열심히 한다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며 그 노력들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그 마음이라는 것은 아주 작은 행실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대개가 자신은 바르며 바른 수양을 하고 있다 생각하나 자신을 아는 이 드물다.

자신이 세상 모든 진리를 터득하지 못했음은 최소한 알고 있을 것이 아니던가.

자신이 배워가고 깨우쳐가는 존재라는 것은 최소한 알고 있을 것이 아니던가.

그러면, 자신의 앎과 수준에 의심도 해 봐야하나 부족한 이일수록 오히려 그것에 강한 믿음만 키우며 스스로 벗어나지 않으려 애를 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노력하지 않기에 자신 스스로 만든 벽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마음 닦는 이들의 공통점이 고집이 무척 세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그 자체를 두고 '좋다' '나쁘다', ‘선’ ‘악’, ‘흑’ ‘백’, '장점' '단점' 등으로 함부로 단정 지으려 해선 안 된다. 무엇을 분리해야만 하는 무의식에 구속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수시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고집을 잘 활용만하면 좋겠으나 반대로 마음 닦는 이가 자신의 짧은 깨우침에 대한 믿음을 절대시하기 쉬워 오만에 빠지기도 쉽고 헤어나기도 더 어렵다. 겉으론 겸손하게 보이려 애쓰나 내심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 여기지 않는 이가 거의 없으며 이것을 자긍심정도에서 그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앎이 앎이 아니고, 깨우침이 깨우침이 아닌 게 된다.


그것을 깨우치며 벗어나는 과정에서 반드시 마음의 공허함이 찾아온다. 공부를 무척이나 많이 하게 되면 오히려 오만함이 멀어지고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려 계속 노력하는 이는 반복해서 경험하게 된다.

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러함을 경험치 못한 이는 자신을 되돌아보라. 그것을 버리지 못할 경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점점 퇴보의 길을 가는 것이니...


또, 탐욕하고 무지한 자들이 부풀리고 지어낸 것들로 인해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데 그 와중에 스스로 진실을 찾기란 더욱 쉽지 않다.



어디에서 진리와 신을 찾을 것인가.


신은 무엇에게 인정받고자 혹은 섬김을 받고자 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천한 존재가 아니다.

신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고 잘 모시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아니면 인간 스스로 신의 마음을 찾아 신과 같은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것을 신이 더 좋아하겠는가?

이러함을 생각해보면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가?


10여 년 전 수련하던 곳에 진리를 찾으러 왔다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를 찾아봐도 진리가 없다하며 진리를 찾으러 이곳까지 왔다한다. 참으로 거창하고 명료하다.


그는 자신과 남을 속이는 데에 아주 능숙한 자였는데,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자가 어찌 진리를 찾아낼 수 있으랴. 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다수는 그를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를 그렇게 봤던 이들 역시 수준이 그것밖에 안되므로 그리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을 보는 안목은 진리를 볼 수 있는 안목과 다르지 않다. 진리를 볼 수 있는 안목은 신과 같은 마음을 얼마나 가졌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 모두가 같은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무지함을 넘어서 제 마음이 바르지 않으니 진리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며 신의 마음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 것이다.

이 자는 평생 진리를 찾으러 헤매지 않겠는가. 자신이 거짓스러우니 어찌 진실을 볼 수 있겠는가.

스스로 신의 마음을 찾지 않으려 하니 어찌 신을 알 수 있겠는가.

자신이 진실하면 진리가 무엇인지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신의 마음이 숨겨져 있는데 어디에서 진리를 찾으며 어디에서 신을 찾을 것인가. 종교에서 찾을 것인가? 이 산 저 산에서 찾을 것인가.('종교를 목적으로 여기지 말고 마음 닦는 도구로 활용하라' 참고)

신을 찾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이 갖고 있는 性(타고난 마음)에 발동이 걸린 것이고 그러한 마음은 인간의 성을 찾고자 하는 애절함이며 바른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제 마음이 발라야 함이 우선이다.

제 마음이 바르지 않으니 자신에게 신과 같은 마음이 있는 지 알 수 없고 찾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신을 멀리서 찾지 말고 내 마음속에서 찾아야 한다. 자신에게서 신을 찾아야 한다. 자신에게서 진리를 찾아야 한다.

바른 마음으로 스스로 노력하다보면 자신에게서 신과 같은 마음을 찾게 되며 신과 같은 존재로 점점 화하게 된다.


자신에게서 신의 마음을 찾는다는 것은 도덕책에서나 나옴직한 일률적인 동일한 이상형이 되어야한다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쫓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신도 성격과 기질은 다 다르다.


하나의 방법만을 고집할 필요도 없고, 종교 안에서만 찾을 필요도 없고, 하나의 종교에서만 찾을 필요도 없다. 단, 깊은 사고와 고뇌 그리고 힘겨운 길을 걸어가야 함은 분명하다.


무슨 일을 하든 무엇을 하든 세상만사 만물에 궁금해 하며 의문을 가지고 생각을 많이 하다보면 그것이 가지에 가지를 쳐 점점 접근하게 된다.

바른 마음에 깨달음에 갈구하는 마음이 합쳐지면 반드시 답을 얻게 되며 깨우쳐 갈 수 있다.

바른 수행을 하려면 자신의 마음이 발라야 하며 생각이 발라야 하며 실천함이 발라야 한다.


무지하고 탐욕하고 미천한 자일수록 이러함에 노력은커녕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자신을 보라. 전두엽을 활용하고 아즈나 차크라를 깨워라.


자신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세상만물을 보는 안목과 다르지 않으며, 이것은 신과 같은 마음을 갖기 위해 자신에게서 신의 마음을 찾는다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스스로를 보라하니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이 거의 없다.

자신을 볼 수 있는 한계가 그 사람의 정신적 깨우침의 그릇과 같다. 그 깨우침이 그릇이 되어주며 그 그릇만큼 능력 또한 담기게 된다.

결국, 자신을 보려 애쓰는 자가 능력자, 고귀한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의 근본은 전두엽이며 그 핵심에는 성인들의 영정에서 후광이 비치는 아즈나 차크라가 있다. 일부에서는 상단전이라고도 하는 부위이다.(‘아즈나 차크라를 개발하라’ 참고)

사물이나 사람 등을 넓게 두루두루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능력 또한 이곳에서 나오며 영안, 영통력, 신통력이라는 것도 이곳을 통해서 이뤄진다.

이것이 각성되지 않고선 영적 성숙은 기대하기 어렵다.


인간을 제외하곤 자신을 볼 수 있는 동물은 거의 없다. 동물들에게 거울을 비춰주면 적인 마냥 대드는 행위를 하는데 자신을 볼 수 있을 만큼의 것을 갖추고 있지 못해서이다.

인간은 거울을 보면 다 자신인 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거울이 없어도 자신을 볼 수 있다. 그러니 크고 작고의 차이일 뿐 그 가능성은 모두에게 있다 할 수 있다.


전두엽이 자신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이며 그것을 잘 활용하여 수준 높은 깨우침을 가지는 자는 아즈나 차크라(상단전)도 각성된다.


어떤 방법으로 각성시키고 발달시키는가 하면...

넓게 두루두루 보고 깊이 생각하고, 탐욕함을 버리고, 인간의 삿된 욕망들을 억제하려 애쓰며, 다른 이의 아픔을 이해하려 애쓰며, 남을 깊이 배려하려 애쓰며, 약하고 부족한 자를 도울 줄 알며, 제3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려 애쓰며, 자연의 이치를 알아가며 인간의 순수한 마음을 찾으려 애쓰면 된다.


어떤 사람이 각성되지 않고 발달이 안 되는가 하면...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사고가 편협한 자, 물질에 가치를 많이 두는 자, 탐욕하며 욕심 많은 자, 육체적 본능을 쫓는 자,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자, 이기적인 자, 오만한 자, 남을 깊이 있게 배려하지 못하는 자, 인색한 자, 가지려고만 하는 자, 어질지 못한 자, 너그럽지 못한 자, 포용력이 부족한 자, 넉넉함과 편안함만을 쫓는 자, 계산적인 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


대체로 보면 이 부위가 발달할 사람들은 약한 듯 보이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고,

이 부위가 발달이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은 강한 듯 보이고 소위 말하는 잘 사는 사람들이 많다.


약한 게 약한 것이 아니고, 강한 게 강한 것이 아니다.

잘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니고, 못 사는 것이 못 사는 것이 아니다.


잘 살아라 하니, 돈 많이 벌어야 잘 사는 줄 안다.

열심히 살아라 하니, 탐욕하고 인색하면서 열심히 산다고 한다.

열심히 수행하라 하니, 절 많이 하고, 염불 많이 하고, 찬송 많이 하고, 경전 많이 외고, 기도 많이 하면 되는 줄로만 안다. 이런 것 아무 소용이 없다.


모두가 자신은 정도 많고 다른 사람을 잘 배려하나 남보곤 이기적이라 한다.

남을 깊이 있게 배려하는 마음과 자신을 볼 수 있는 안목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을 잘 볼 수 있는 자가 그만큼 남을 잘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다.

그것은 둘이 아니다.


자신을 스스로 볼 수 있는 자, 자신을 보려 노력하는 자가 세상만사 세상만물까지 두루두루 볼 수 있게 되며 그 깊이는 남다르다.

자신을 스스로 볼 수 없는 자, 자신을 보려 애쓰지 않는 자일수록 편협하고 깨우침과는 거리가 멀며 스스로 미천한 존재가 된다.

편협하다는 것은 자신을 잘 보지 못하는 자가 자신의 비뚠 마음에 집착하는 것이며, 이것은 남과 세상만물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 자신과 남을 함께 두루두루 잘 보지 못하는 것과 통한다.


남을 깊이 있게 배려할 수 있는 자일수록 전두엽은 발달하고 상단전은 각성되며 수준 높은 깨우침을 가질 수 있다.

그러니 성인이라 하는 분들의 남을 배려하는 마음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들이 단순히 영적 수준만 높은 분들이 아니다.

'영적 수준이 높다' 라는 표현에는 인간적인 아름다운 마음까지 갖고 있다는 것이 포함되며 이것을 제외하고 영적 수준만 높아질 순 없다.


그만한 깊이와 그만한 배려심과 그만한 인성을 갖고 있기에 그런 깨우침을 가질 수 있고 그런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별개가 아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을 가지려 애쓰며 그것을 간직하고 있어야만 큰 깨우침을 가질 수 있으며 신통이란 것도 가질 수 있다.

신과 같은 마음, 즉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는 것이 최고의 수행법이다.


신통력은 자신이 그만한 수준이 되면 자연적으로 가지게 된다. 대개 말하는 신이라 하는 것은 영인데 신의 수준과 능력에 비교하기엔 무리다.

신통의 과정도 한 번에 모두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양정도에 따라 영적 수준에 맞는 신통력을 단계별로 가지게 된다.


그것을 가지려는 욕구가 지나치면 신으로 가장한 영들의 접근과의 힘겨운 싸움도 해야 할 것이며, 제 그릇이 되지 않는데 신의 능력을 가진다면 그 자신이 견딜 수가 없다. 그만한 깨우침과 그릇이 되지 않는 자에게 그런 능력이 심어질 수도 없다.

자신을 잘 보지 못할수록, 자신의 수준이 부족할수록 그런 능력들을 부러워하며 착각에도 쉽게 빠진다.


신통이라는 것은 신과 통한다는 것으로, 파장(마음=수준=사이클)이 일치한다는 것이며, 그만한 그릇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마음 닦는 이는 신의 능력을 가지고 싶어 하지만 자신은 그만한 노력을 하고 있는 지 바르게 수양하고 있는 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영통력 또한 신통력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수양한 만큼 가지게 되는데 수준과 그릇이 되지 않으면서 성급히 욕심 부려 스스로를 퇴보시키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착한 것만으론 안 된다. 종교나 경전에서 착함, 선 이라는 것을 강조들 하고 있으나 영적 성숙과는 그리 관계가 없다.

착함을 갖고 있다하여 인간의 고귀한 아름다운 마음을 이루었다 여겨선 안 된다.


착한이 중에선 편협한 이도 많고, 무지한 이도 많고, 어리석은 자도 많다.

물론, 이것조차 부족하여 착함도 갖추지 못한 혹은 그것에서 멀어진 이들이 적지 않으나, 착함이라는 것은 수양하기 이전의 상태, 혹은 계속 간직해가는 기본조건일 뿐이다.


어린 아기들은 참으로 착하고 순수하다. 이가 날 때쯤 되면 이것저것 물기를 좋아하는데, 그 대상은 사람이라해도 가리지 않는다.

지금은 성장했지만, 한번은 조카가 할아버지의 다리를 물어서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이 보기에 끔찍할 정도였으나 조카는 그것이 재미있다고 웃고만 있었다.

이러함은 악이 아니다. 물리는 사람이 아파하는지를 알지 못해서일 뿐이다.


어릴수록 남의 마음을 깊이 헤아릴 수 없고 잘 알지 못하나 성장할수록 자신을 보게 되고 자신의 아픔을 경험하고 그것이 다른 사람과 같음을 알게 되니 다른 이의 고통도 알게 되고 아픔도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성숙하여 깊이 있게 배려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가 그러함을 작게는 알게 되나 오히려 더 이기적인 인간이 된다.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의해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자신을 보는 힘, 남을 배려하는 마음, 진리를 보는 안목, 영적 수준, 닦임의 그릇, 인성, 깨우침 등의 것들은 모두 하나로 통하나 착함은 그것에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착함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러함을 가질 수 있겠으며 그러함을 이룬 자는 착함도 갖춘 것이겠으나, 착함을 갖춘다고만 해서 위의 것을 이루진 못한다.


착함이라는 것은 노력으로 닦이기 전의 상태이다.

이것조차 부족한 이들이 적지 않으니 이전 성인들이나 경전에서 착함, 선함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데, 깊이 있게 마음을 닦아가며 영적으로 성숙해가는 존재인 인간이 착함에서 정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의 고귀한 아름다운 마음, 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도 역시 선도 악도 아닌 것에 가까워지는 마음이다.

신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음양(여성 남성)의 구분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최고신은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닌 무극, 혹은 일원의 상태라 할 수 있다.


타고난 원래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원심회귀라는 말이 인간 원래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일 뿐, 어리석게 착함에 만족하여 자신을 개발하는데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순수하고 착함을 계속 간직하거나 그것조차도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의 과제이다.

위에서도 비유했듯이 착함이란 원석과 같고, 닦아서 고귀함을 갖춘 마음을 다이아몬드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자신에게서 신과 같은 마음을 찾으라.


신에 대한 맹목적 경외감, 절대적 믿음, 맹목적 바람 등 그 자체는 그리 나쁘다고 볼 수 없으나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함이 개입되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심각한 수준의 문제까지도 야기한다.

그러니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바른 이해가 필요하며, 그 외 구체적인 행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해 봐야 할 것이다.


대개 신이라 하는 존재를 자신이 바라는 바를 들어주는 기도의 대상으로 생각하고들 있다.

신은 인간사에 개입을 하지 않는다. 신이 인간의 사사로운 욕심까지 채워주랴.

신을 찾고자 하는 마음, 신을 갈구하는 마음은 바람직한 것이나, 자신에게서 신의 마음을 찾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기도의 핵심과 대상은 자신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아가야만 한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 정한 바대로 이룰 수 있는 능력이다.

자신에게 신과 같은 마음이 있다. 그것을 찾으려 애쓰는 노력이 신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고 최고의 기도법이자 최고의 수행법이다.


기도의 대상을 경외롭게 여기고 믿음이 클수록 마음의 파장이 증폭되나, 그 대상을 기도의 도구로 삼아야지 일방적으로 의지해선 안 된다. 주체는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강조하니 부족한 이는 자신을 목적이나 목표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그것이 지나치면 자신에 대한 집착이 되며 오만해지게도 되니 그것조차 경계해야함이 마땅하다.


스스로에게서 신의 마음을 찾는 것이 빠르고 바른 길이다. 바른 마음으로 노력하다보면 자신에게서 그것을 찾게 되어있다.

어떠한 종교, 어떠한 수련법이든 간에 이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것, 혹은 핵심은 잊고 구체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모두 사이비이다.


특히 마음 닦는 이, 종교인, 기타 모든 수련을 하는 이들은 이러함들을 반드시 스스로 일찍 깨우칠 수 있어야 한다.



인간과 신이 함께하는 이상세계


최고의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그도 역시 나와 같은 독립적인 존재로 인간과 같이 닦아가는 존재이다. 나의 마음을 그도 어찌하지 못한다.

최고신이라 해서 완전하다고 믿는 것은 맹목적 믿음과 무지함에서 나온 것이며, 그 존재는 경외로우나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신의 마음은 인간의 마음과 다를 바 없다. 자신이 그러하지 않기에 그것이 다른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신이라 해서 다 같은 신도 아니다.

인간세상에서 서열을 메기라 하면 다수가 부와 권력자 순으로 메기겠지만 인간계이든 신계이든 닦임의 정도에 따라 구분되어진다.


신과 인간은 다른 것이라 할 수 없으며 함께 조화를 이뤄 살아가야 함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물질문명과 개인주의에 물들어 스스로 애써 신과의 거리를 점점 멀게 만들고 있다. 인간이 그렇게 한 것이니 신과의 거리를 좁힐 책임은 바로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인간의 고귀한 마음을 찾고자 꾸준히 노력하는 자는 인간의 체를 가진 신으로 화할 수 있다.

신의 자격을 갖춰 태어났으나 그것을 잃거나 찾지 못해 스스로 미천한 자가 되는 이가 대부분이며, 그것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

인간 개개인은 신과 같은 독립적 존재이며 자신 외의 무엇에 자신이 움직여지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진실을 왜곡하는 등의 작은 영향을 미치는 인간과 영의 간섭은 받는다. 하지만 이것도 자신을 지키며 노력하는 자에게는 별 문제되지 않는다.


인간 모두가 깨우쳐 닦아가야 하는 존재이며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것이지 누가 대신 해줄 수 없다. 물론 신도 해주지 않는다. 핵심은 자신이다.

탐욕하고 무지한 자들이 다수라 해서 그들을 애써 따라갈 이유는 없다. 나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며 스스로 이뤄야 하기 때문이다.


신이라는 것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신화처럼 거창한 것도 아니다.

신의 능력이라는 것도 자신이 그만한 수준이 되면 자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것이니 성급히 욕심 부릴 이유가 없다.

또, ‘어찌해서 그것을 부러워하는가.’ ‘왜 갖고 싶어 하는가.’ 를 자신에게 스스로 되물어 봐야 할 것이다.

자신의 집착은 아닌지 의심해 보기도 해야 한다. 그 무엇에 대해서도 집착을 하고 있다면 그것을 가질 수 없다.


수준이 높은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도 집착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바른 마음으로 인간답게 살고 자연을 알려는 노력을 하다보면 그러한 존재가 되어있음을 자연스럽게 확인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수준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도 스스로 무엇에게 인정받고자 함이나 집착을 모두 버리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인간의 마음이 신과 같게 되면 신과 인간이 함께하는 이상적인 세상이 될 수 있다.

신이 종교나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부풀려지고 과장되어 경외롭고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 아닌, 내 가족, 친구, 이웃과 같은 존재로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워 살기 어려운 만큼 살기 좋은 세상도 될 수 있다.


인간이 육체를 갖고 있어 이기심과 탐욕함, 집착 등에 빠지기 쉬우니 고통을 가지게 되며 수시로 미묘한 감정을 경험한다.

반대로 '고통의 덩어리' 라고 하는 육체를 갖고 있기에 아픔과 힘겨움의 크기만큼 지극히 아름다운 마음과 평안함 또한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살아있을 때 가치가 큰 것이지 죽어서는 그만큼이라 하기 어렵다.

죽어서 닦아 부족함을 채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육이 없으니 죽어서 그런 세계를 만들지도 못한다.

내가 살아생전에 이룰 수 있음에 가장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있을 때 신과 함께하는 세상이 최고의 이상세계이다.



신과 같은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는 것은 각자의 책임이자 임무이다.


인간의 마음은 육을 갖고 있으니 물질에 집착하기 쉬우나, 점점 그러해지는 환경에 뒤섞여 자신을 지키고 바른 수행하는 자는 이전 수행하여 가치 있는 존재가 된 자들보다 더 큰 깨우침과 그릇을 가질 수 있다.

환경이 열악해질수록 노력하는 이들에겐 더 좋은 조건이 되어주는 것이다.

더군다나 미디어의 발달로 찾고자만 한다면 어렵지 않게 자료를 찾을 수 있으니 참으로 좋은 시대라 할 수 있다.

전체가 물질주의 탐욕스러움에 빠져들수록 그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바르게 수행하는 극소수는 참으로 대단하고 대견한 이들이다.


자신에게서 신의 마음을 찾으려 노력하다보면 고귀한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 마음이 천당이라면 천당이며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니다.

자신이 수양한 만큼 가지게 되는데 자신이 살아생전에 그런 깊이를 가지게 되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이것은 인간으로서 걸어가야 할 바른 길이며 이루어야 함은 개인 혹은 인간 전체로서의 책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