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똥철학

종교나 수련법의 수준을 가늠하는 방법

금빛오오라 2013. 12. 16. 20:28

종교나 수련법은 현재 시기의 중요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어야 하며 확실한 해결방법도 갖고 있어야 한다. 매우 중요한 현재의 시기에서 대중들을 깨어나게 하고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와 수련법의 수준을 가늠하는 방법은 아래와 같다.


대중들은 안목이 없으니 수준 낮은 종교나 수련법에 많이 몰리게 되어 있다. 수준 높은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깊이를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도나 회원이 많을수록 대중적이라는 것이며 수준이 낮다. 그러니 규모로 봐서는 안된다. 규모가 작을수록 높다는 것도 아니다.


수준이 높은 것은 거창하지 않고 혹할만한 방법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적이나 초능력을 보이거나 강조하는 곳은 수준이 낮다. 큰 능력이 없으므로 진짜 능력을 모르므로 가치없는 그러함을 보이는 것. 저급한 영혼일수록 요란하며 수행을 맛봤다해서 초능력이라 하며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예언만을 우선으로 강조하는 곳은 거리를 둬야한다. 왜냐하면, 맞춰가려는 자는 낮고 만들어가려는 자는 높기 때문이다. 예언에 맞춰간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것과 같다. 예언은 부분 활용은 하되 맞춰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수준 높은 것은 스스로 찾아 만들어가기를 바라고, 수준 낮은 것은 조작하고 끼어맞춰 보여주려고 한다.


음식 등의 미끼나 강제적인 포교를 사용하는 종교는 수준이 낮다. 각각의 인간은 독립적인 영성이라 스스로 찾게하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최고의 신인 자연의 마음이라는 것은 한없이 베풀지언정 무엇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려고 하지 않지 않은가. 자연의 따스한 햇볕은 모든 생명체에 한없이 베푼다. 이것은 미끼도 아니고 조건도 아니다. 진리라는 것은 있는 그 자체인데 매일 보고도 모른다. 자연과 나, 이상과 현실을 별개라고들 생각하지만 다 한가지이다.


어려운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곳일수록 수준이 낮다. 이것은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런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지식들이며 과시하기 위함이며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다. 원래 진리라는 것은 쉽고 간단한 것이다. 꾸미고 왜곡하기에 복잡하고 어렵게 되는 것이다. 대중들을 위하려는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러하지 않게 되어 있다. 경전이나 교리라는 것 자체가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춘 것인데 어려운 말을 적을 이유는 없으며, 진리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어려운 단어는 필요가 없다. 또, 진리라고 해서 거창하게 생각하거나 자신과 거리가 먼 것이라 생각할 이유는 없다.


인간의 영혼이 영원불멸하다는 것을 모르고 환생없음을 모르고 생전의 닦음의 중요성을 모르는 종교나 수련법들은 수준이 낮다. 믿는다고 해서 높아지는 법은 세상에 없다. 믿어 죽어서 천당이나 극락 가는 법도 세상에 없다. 죽어서 닦을 수 없다. 생전에 자신이 닦은만큼 죽어 거할 곳이 정해지며 영생한다. 그러니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이치를 모르는 종교나 수련법은 수준이 낮다.


종교내에서만 닦을 수 있다거나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은 수준이 낮다. 인간은 어디에 있든 자신에겐 신의 마음이란 것이 있다. 자신이 훌륭한 안테나를 갖고 있음에도 활용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마음수양은 장소에 제한 받지 않는다. 어디에서만 이뤄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종교나 수련법은 수준이 낮다. 이것이 안되는 자, 혹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강제로라도 가르칠 필요는 있다. 종교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종교에 갇혀서는 안될 것이다. 그 어떤 종교도 예외가 없다. 왜냐하면, 종교라는 틀 자체가 이미  변질된 것이기 때문이다. 머지 않아 모든 종교는 하나의 신앙으로 통합된다. 여기서 신앙이라는 것은 종교에서 왜곡시킨 신앙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륵신앙과 같은 순수신앙심을 말하는 것이다.


진실과 오만함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높고자 하는 것도 억지이며, 낮고자 하는 것도 억지이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와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은 자가 아니다. 수준을 갖춘 것은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으니 그대로 보여주지만 대중들은 안목이 없고 갇힌 도덕적 관념으로 보려하니 진실을 오만함이나 부족함으로 보기 쉽고 억지를 높음으로 보기 쉽다. 높아지고자 함도 아니고 낮아지고자 함도 아니고, 억지적이지 않은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예(禮)'의 정확한 개념이다.


수준이 높은 것은 행(行)을 강조하고 영을 알고 신을 알고, 수준이 낮은 것은 믿음만 강요하고 영을 모르고 신을 모른다.

수준이 높은 것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수준이 낮은 것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수준이 높은 것은 악을 알게 하고, 수준이 낮은 것은 악을 모르거나 악과 한 패가 된다.

수준이 높은 것은 밖(사회)에서 이루려고 하고, 수준 낮은 것은 그 안(자신의 종교나 수련)에서 이루려고 한다.

수준이 높은 것은 사회적 의식을 고취시키려 하고, 수준이 낮은 것은 세뇌를 최우선으로 여긴다.

수준이 높은 것은 대중들을 깨어나게 하는 데에 모든 정성을 쏟으며, 수준이 낮은 것은 그러함에 관심없이 시기만 기다린다.

수준이 높은 것은 스스로 하게끔 하고, 수준이 낮은 것은 지시하여 억지로 만들어간다.

수준이 높은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고, 수준이 낮은 것은 세를 불리려고만 한다.


이러한 관점에 의해 부족하게 보이는 종교나 수련법들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는 될 수 없다. 수준 높은 지도자를 찾아야 하는 것은 능력을 가지기 위함도 아니고 자신이 살고자 함도 아니다. 진짜 능력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마음의 크기, 측은지심, 어질고 착한 마음의 그릇에 심어진다. 종교나 수련법이 수준이 높다면 이것이 핵심을 이루고 가르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자연의 마음이고 신의 마음이고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을 가진 자는 행(行)으로 표현된다. 그 행은 용기이고 의로움이다.


바른 수양으로 일정수준에 도달하여 자연의 파장과 가까워지게 되거나 일치하게 되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치유의 능력이 반드시 생기게 된다. 이것은 예외가 없으니 이 능력의 크기로 무엇을 분간하면 된다. 어느 시기가 되면 악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보이게 되는데, 이때는 누구나 다 알아볼 수 있으니 의미없다.


안목이 부족한 자일수록 자신의 편협함과 오만함을 믿음이라 여긴다. 다만 늦은 시기에는 안목이 없는 자라도 찾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안목에 의함이 아니라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자신의 잠재적 안목에 의한다.


바른 마음으로 진실을 보려는 노력을 일상생활에서 반복하다보면 자연적으로 안목이 형성되게 되고 세상 보는 눈이 조금씩 트이게 된다. 이것은 그만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자만 갈구하게 되어 있고 안목이 형성되게 되어 있다. 잠재성이 부족한 자는 이것에 관심이 그리 없다. 아무튼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안목으로 판단하는 것이 가장 좋고, 이것이 어렵다면 안목을 가진 자의 말을 따르면 된다.